항목 ID | GC03401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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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花開場-三一運動紀念碑 |
영어의미역 | Memorial Stone of March First Movement at Hwagae Traditional Market |
이칭/별칭 | 화개 3·1 운동 추모비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탑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추경화 |
조성|건립 시기/일시 | 2001년 3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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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탑리 |
성격 | 기념비 |
관련 인물 | 추호석|이병호|추경화|정문장 |
크기(높이, 길이, 둘레) | 2.7m[높이] |
소유자 | 충효예 실천운동본부 진주지회 |
관리자 | 충효예 실천운동본부 진주지회 |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탑리에 있는 화개장터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개설]
화개장터는 하동군의 3·1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난 현장이다. 1919년 4월 6일 쌍계사 승려와 학생 김주석(金周錫)·양봉원(梁鳳源)·정상근(鄭相根:丁湘根) 등이 앞장서고 애국 청년 이강률(李康律)·이정수(李汀秀)·임만규(林萬圭)·이정철(李正哲) 등이 동참하여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장꾼 300여 명과 함께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감화를 받은 이강률·이정수·이정철·임만규 등은 4월 11일 화개장날에도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화개면장, 면 직원 사직 권고문을 작성하여 화개면 삼신리에 있던 화개면사무소 앞에 게시하고 화개장터 3·1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경에 발각 체포되어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김주석은 징역 6개월, 양봉원은 집행 유예 3년, 이정수는 징역 10개월, 이강률은 징역 8개월, 이정철은 징역 8개월, 정상근은 집행유예, 임만규는 징역 8개월이 선고되어 옥고를 치렀다. 뒤에 이정수는 건국포장, 임만규과 이강률 등은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고 다른 이들은 미포상되었다.
[건립 경위]
화개장터 삼일운동 기념비는 일제 강점기에 조국과 민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며 투쟁한 이들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향토 사학자 추호석이 2000년 10월 후손들을 찾아가서 의논한 결과 기념비를 세우기로 합의하고 충효예 실천운동본부 진주지회가 앞장서서 건립을 추진하였다. 화개장터 3·1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추경화]를 조직하였으며, 추호석이 글을 지어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 심사위원 정문장의 글씨를 받아 2001년 3월 10일 비석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제막식에 공무원과 학생, 직계 후손, 광복회 경남지회화개청년회 등 5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위치]
하동군 화개면 삼신리 화개면사무소가 있던 곳인 삼신리 어귀에 세우고 제막식을 하였다. 그러나 화개장터가 하동군 화개면 탑리 일대로 옮겨 새롭게 건립되어 크게 번창하자 면민들이 앞장서서 여론을 조성하고 면장과 직원들이 적극 협력하여 화개장터 옆 교량 어귀로 옮기게 되었다. 2009년 가을에 또다시 화개파출소 건너편, 즉 같은 화개장터로 옮긴 뒤 나무 장승 2개와 나무 울타리를 세우고 주위에는 화단을 조성하였다.
[형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전통 방식의 효자비, 열녀비와 비슷한 모양을 가진 비석이다. 기단은 사각형 화강암에 무궁화를 새겼고, 비신(碑身) 위에는 지붕 모양을 갖춘 양식이다. 높이는 2.7m이다.
[현황]
화개장터 3·1 운동 기념비는 현재 화개파출소 건너편에 작은 공간을 마련하여 언덕을 세우고 나무 장승 2기를 세웠고 화단을 조성하였으며 울타리석을 조성하여 보호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현충 시설물로 등록되었으며, 충효예 실천운동본부 진주지회장 추경화가 관리자로 되어 있다. 화개청년회와 면사무소, 그리고 단체에서 매년 3월 1일 오전에 기념식을 거행한다.
[의의와 평가]
화개장터 삼일운동 기념비는 화개장터 한가운데에 조성되어 호국 선열의 깊은 뜻을 계승하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터전으로 훌륭한 역사 교육의 장이 되기에 손색이 없을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