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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산선유일기」[성여신]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470
한자 方丈山仙遊日記-成汝信-
영어의미역 The Travel Diary of Bangjangsan Mountain by Seong Yeosi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강정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546년연표보기
저자 몰년 시기/일시 1632년연표보기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616년연표보기
배경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지도보기
성격 한문학|유람록|기행록
작가 성여신(成汝信)[1546~1632]

[정의]

1616년 부사 성여신이 경상남도 하동군의 쌍계사불일암 일대를 유람하고 지은 유람록.

[개설]

「방장산선유일기(方丈山仙遊日記)」는 『부사집(浮査集)』 권5에 실려 있다. 성여신(成汝信)[1546~1632]은 71살 때인 1616년(광해군 8) 9월 24일부터 10월 8일까지 15일 동안 하동을 거쳐 지리산[1,915m] 쌍계사(雙磎寺), 불일암(佛日庵), 신응사 등을 유람하였다.

성여신의 자는 공실(公實), 호는 부사(浮査),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1552~1617)를 도와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전공을 세웠지만, 전란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강호에 묻혀 은일의 삶을 지향하였다.

만년의 정세는 치열한 당쟁을 일삼던 광해연간의 시기였고, 게다가 정인홍(鄭仁弘)[1536~1623) 등의 대북 정권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하는 정치적 격변기였다. 성여신은, 처음에는 동문인 정인홍과 뜻을 같이하였지만 후에는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하였던 정온(鄭蘊)[1569~1641] 등과 같은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른바 중북의 노선을 지지하였다. 그리하여 성여신의 불우는 보다 극대화되었고, 만년에 신선 세계에 몰입하는 경향을 보였다.

중년 이후 자신의 불우를 달래기 위해 여러 곳을 유람하였는데, 지리산 지역만 해도 홍류동 2번, 청학동 5번, 백운동 1번, 천왕봉 1번을 유람하였다. 78살 때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을 유람하고 지은 172구의 장편시 「유두류산시(遊頭流山詩)」가 유명하다.

[구성]

‘유람의 동기→일정별 유람 기록→유람의 총평[후기]’ 등 유람록 서술 체재에 따라 일정별로 자신의 감흥을 기록하고 있다. 성여신은 자신의 거처인 진주의 부사정(浮査亭)을 출발하여 사천→하동 횡포→삽암(鈒巖)쌍계사불일암신응사를 거쳐 귀가하는 일정으로 유람하였다. 동행은 정대순(鄭大淳)[1552~?], 강민효(姜敏孝), 박민(朴敏)[1566~1630], 이중훈(李重訓), 문홍운(文弘運)[1577~1610], 성박(成鑮)[1571~1618], 성순(成錞)[1590~1659] 등이다.

성여신은 동행한 이들을 모두 신선의 호를 붙여 불렀는데, 자신을 부사소선(浮査少仙), 정대순을 옥봉취선(玉峰醉仙), 강민효는 봉대비선(鳳臺飛仙), 박민능허보선(凌虛步仙), 이중훈은 동정적선(洞庭謫仙), 성박죽림주선(竹林酒仙), 문홍운매촌낭선(梅村浪仙), 성순은 적벽시선(赤壁詩仙)이라 하였고, 자신들의 유람이 신선들의 놀이였기에 유람록 제목을 「방장산선유일기」라 하였다. ‘방장산’은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옛날 신선이 사는 산이라는 뜻으로, 신선 세계를 꿈꾸는 이들의 이상이 깃든 명칭이다.

[내용]

성여신은 현실에서의 불우를 달래기 위해 하동군의 청학동을 유람하였다. 하동군 청학동 일대인 쌍계사불일암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이 청학을 타고 왕래한 일화로 유명하며, 신응사 주변의 삼신동 계곡은 빼어난 경관으로 자주 거론되는 곳이다. 성여신 일행은 유람하는 곳마다 자신의 감회를 소상히 풀어내었는데, 특히 「방장산선유일기」에는 한시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사천 곤양 땅을 지나면서 “나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 애초 세상 밖 사람 아니라네/ 가을바람에 높은 흥취 이니/ 신선을 배우는 사람이 되리”라고 읊은 한시에서 보듯, 대부분의 작품에서는 자신들의 유람을 아름다운 신선 세계에 대한 선망으로 표출하고 있다. 그러나 「방장산선유일기」 말미에서 “선비의 한 몸은 경제를 그 계책으로 하고, 선비의 한 마음은 겸선(兼善)을 그 뜻으로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산에 들어갈 수 없겠으며, 어찌 신선을 배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조선 시대 선비의 본분이 경세제민(經世濟民) 및 남과 선을 함께하는 데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성여신은 이런 의식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만년에 신선 세계를 동경하면서도 그쪽으로 온전히 빠지지 않고 다시 선비의 본분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성여신의 선유(仙遊)는 실제로 선(仙)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유선적(儒仙的) 선취(仙趣)라 할 수 있다.

[특징]

조선 시대 청학동 유람은 대체로 현실에서 부딪힌 자신의 불우를 극복하고 해소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성여신청학동 유람 또한 이러한 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성여신이 처하였던 현실적 불우가 유람록 작가 그 누구보다 처절하고 극심하였기 때문에 작품 속에서 선계를 갈구하는 마음 또한 더욱 강하게 표출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의의와 평가]

성여신「방장산선유일기」는 스승인 남명 조식청학동 유람을 계승한 의의를 지닌다. 조식「유두류록(遊頭流錄)」은 조선 시대 유학자의 청학동 유람의 대표적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유람 도중 접하는 역사적 유적에서 단순한 자연 경관만을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다간 역사적 인물의 삶을 회고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의 지남(指南)으로 인식하는 유학자적 자세가 더욱 돋보이는 작품이라 하겠다. 성여신「방장산선유일기」 또한 선계로의 유람을 갈망하면서도 궁극엔 유학자적 자세를 견지하려 애쓰는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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