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0867 |
---|---|
한자 | 河東花史別墅 |
영어의미역 | Akyang-myeon jeongseo-ri Hwasabyeolseo(Jo’s Old House) |
이칭/별칭 | 조씨 고가,조부자집,악양면 정서리 조씨 고택,악양면 정서리 조씨 고가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808-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화봉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9년 11월 14일 - 하동 화사별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57호 지정 |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하동 화사별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
현 소재지 |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808-1 |
성격 | 전통 가옥|고가 |
정면 칸수 | 6칸[행랑채]|2칸[정지]|2칸[대청] |
측면 칸수 | 1.5칸[행랑채]|1.5칸[정지]|1.5칸[대청] |
문화재 지정번호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정서리에 있는 조선 후기 상류층 전통 가옥.
[개설]
하동 화사별서는 평양 조씨(平壤趙氏)의 세도가 주거로서 흔히 ‘조부자집’, '조씨 고가'로 알려져 있는 하동의 대표적인 상류 주택이다. 조선 태조, 정종, 태종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조준(趙浚)[1346~1405]의 직계손인 화사(花史) 조재희(趙載禧)의 별서(別墅)이다. 본가는 경성부 당주동 37번지였다.
조재희는 중앙의 세도 싸움에서 밀려 낙향한 양반이지만 하동 지역에서는 세도가였다. 이러한 연유로 하동 화사별서는 하동군 악양을 배경으로 하여 박경리(朴景利)가 쓴 소설 『토지』의 주 무대인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이다. 2019년 11월 14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5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변천]
19세기 중반 조재희에 의하여 건축되었다고 한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조재희가 16년에 걸쳐 건축한 것이라고 하나 사랑채는 멸실된 상태이다. 안채의 상량에 “개국 오백이십칠년무오 입주상량(開國五百二十七年戊午立柱上樑)”[1918년]이라고만 되어 있어 당시에 어떤 건물이 어떤 순서로 건축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사랑채는 원래 정면 6칸, 측면 2칸이었으며, 후원에 초당과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동학 농민 운동 때에 화재를 당하고, 또한 6·25 전쟁으로 다시 불타 현재는 안채와 행랑채만 남아 있다.
[형태]
주거의 구성은 정남향의 넓은 터에 남북으로 긴 대지가 몇 단으로 조성되어 있다. 대문은 1칸의 단출한 구성으로 전면 동측 면에 위치한다.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 마당을 지나 서쪽 끝으로 깊은 터를 파서 대규모의 방지(方池)를 만들고, 석축을 높이 쌓았다. 사랑 마당은 빈터로 남아 있으며, 사랑의 서쪽에 안채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었음을 돌계단과 석축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랑채 영역은 이 통로에 의해 좌우로 나뉘며, 방지를 앞에 두고 넓은 터가 있어 별당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안채 영역은 높은 기단을 쌓아 사랑채 영역과 구분하였다. 안채의 중문(中門)이 있었을 자리에는 잘 다듬은 돌계단만 남아 있다. 이곳에는 1칸의 헛간만 남아 있다. 그 반대편인 서쪽에는 측면으로 돌아앉은 행랑채가 안채를 바라보며 있는데, 정면 6칸, 측면 1.5칸으로 2칸의 고방과 행랑채가 구성되어 있고, 측면으로 나가는 대문간을 두었다. 안채로의 출입을 사랑을 통하지 않고 따로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안채는 중부 지방의 ‘ㄱ’자형 평면에 양쪽 지붕이 모두 팔작으로 구성되어 있어 매우 우아한 자태로 보인다. 전면으로 나와 있는 정지[부엌]와 안방이 남북으로 일렬로 위치하며, 안방의 측면으로 남향하여 대청과 건넌방이 위치한다. 안방은 3칸의 온돌방이 연이어 있고, 그 뒤편에 골방이 일렬로 붙어 있어 기능적 편의성을 더하였다.
정지는 정면 2칸, 측면 1.5칸의 넓은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내부에 기둥이 없어 많은 작업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상부에는 전체가 다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지의 벽은 통기에 용이하도록 세살창으로 구성하였다.
대청과 건넌방 앞에는 4칸이 모두 퇴로 형상되어 있다. 대청은 정면 2칸, 측면 1.5칸으로 넓게 구성되어 있고, 5량으로 가구되었다. 건넌방은 온돌방 1칸에 서쪽 끝으로 마루방을 두었고, 각 방의 뒤에 골방을 두었다. 따라서 대청 쪽은 2칸 깊이로 구성되고, 안방 쪽은 1.5칸의 깊이로 구성되어 있어 전체의 칸 수가 15.5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방과 건넌방 영역의 굴뚝을 따로 구성하여 후원의 석축에 붙여 놓았다. 이 높은 석축은 안채의 평탄한 영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절토한 것으로, 당시의 기술력으로 보아 적지 않은 노동력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행랑의 뒤쪽과 같은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 행랑 뒤의 넓은 자리에 장대석(長臺石)의 초석열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구전되는 초당이 있었던 자리로 파악된다. 초당 자리와 안채 사이는 원 지형의 경사를 그대로 둔 언덕길이 있고, 그 위로 넓은 후원이 형성되어 있다. 안채의 뒤로는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현황]
‘ㄱ’자형의 안채와 ‘一’자형의 행랑채만이 앞 트인 ‘ㄷ’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남아 있고, 사랑 마당은 한쪽에 규모 큰 방지(方池)만이 남아 있어 옛 영화의 아쉬움을 더하게 한다.
[의의와 평가]
하동 화사별서는 현재 안채 영역의 건물만 남아 있지만, 그 가구 수법이나 규모 면에서 볼 때 가히 하동의 대표적 가옥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
2019.02.20 | 항목명 수정 | 악양면 정서리 조씨고택을 악양면 정서리 화사별서로 수정하고, 관련 멀티미디어 자료명도 수정 완료 |
2014.07.18 | [개설] 수정 및 [현황] 일부 삭제 | <변경 전>풍양 조씨(豊壤趙氏) / 직계손이며, 헌종의 모친인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1808~1890]의 조카 조재희(趙載禧)의 가옥이다. / 실제 모델에 가깝다고 하겠다. / 2011년 현재 조씨 고가의 소유자는 전민자이다. <변경 후>평양 조씨(平壤趙氏) / 직계손인 조재희(趙載禧)의 가옥이다. / 실제 모델이다. / '2011년 현재 조씨 고가의 소유자는 전민자이다.' 삭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