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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응룡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946
한자 崔應龍
영어공식명칭 Choi Eungryong
이칭/별칭 사서(士瑞),송암(松巖),충절(忠節)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바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37년연표보기 - 최응룡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66년 - 최응룡 광주목사 부임
몰년 시기/일시 1592년 7월 8일연표보기 - 최응룡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05년 - 최응룡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녹훈
추모 시기/일시 1789년 - 최응룡 이조판서(吏曹判書) 증직·‘충절(忠節)’ 시호 추증
거주|이주지 구소촌(九沼村) - 광주광역시 남구 구소동 지도보기
성격 문신·의병
성별
본관 삭녕(朔寧)
대표 관직 형조참판(刑曹參判)

[정의]

조선 전기 전라도 광주 출신의 문신·의병장.

[가계]

최응룡(崔應龍)[1537~1592]의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사서(士瑞), 호는 송암(松巖), 시호(諡號)는 충절(忠節)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최영호(永顥)이고 할아버지는 최수언(崔秀彦)이다. 아버지는 최경립(崔卿立)이며 어머니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부인은 경주이씨(慶州李氏)이고 아들은 최영수(崔永水)이다.

[활동 사항]

최응룡은 1537년(중종 32)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경사(經史)에 밝고 성품이 강직하였다. 일찍이 문과에 입격하여 주부(主簿),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 등을 역임하였고, 1566년(명종 21)에는 광주목사(光州牧使)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고을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병조참지(兵曹參知), 승지(承旨) 등을 역임하였으며, 밀양부사(密陽府使),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개성유수(開城留守), 한성우윤(漢城右尹) 등을 두루 거쳤다.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재임하던 중 관직에서 물러나 남평현(南平縣) 두산면(頭山面) 구소촌(九沼村)[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구소동]으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최영수와 함께 가동(家僮)을 거느리고 의병을 일으켰다. 최응룡은 의병을 거느리고 6월 3일 유팽로(柳彭老), 고경명(高敬命)이 이끄는 옥과의병(玉果義兵) 등과 합류하여 전라좌의병(全羅左義兵)을 이루었다. 7월 8일 금산(錦山)에 도착하여 왜적과 전투하여 수천 명을 무찔렀으나, 결국 아들 최영수와 함께 순절하였다.

[상훈과 추모]

최응룡은 1605년 아들 최영수와 함께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으며, 1789년(정조 13)에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증직되고 ‘충절(忠節)’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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