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32
한자 外勢- 抵抗-舊韓末-義兵活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노성태

[정의]

구한말 외세에 저항하여 전라남도 및 광주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 활동.

[개설]

1907년 고종 황제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에 맞서 전국적으로 대규모 의병이 거병하였다. 이와 동시에 해산된 군인이 의병에 참여하고 평민 출신 의병장이 등장하면서 의병 운동이 의병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그중 광주·전라남도에서의 항쟁이 가장 치열하였다. 한말의 의병 정신은 일제하 광주·전라남도의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그리고 해방 이후 시대정신인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최대 의병 항쟁지, 광주·전남]

일제강점기 역사학자이면서 독립운동가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朴殷植)[1859~1925]은 의병을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정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정의로 일어난 민군(民軍)”이라고 정의하면서,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어 박은식은 “대체로 각도의 의병을 말한다면 전라도가 가장 많은데, 아직까지 그 상세한 것을 모르니 후일에 기대하려 한다.”라고 그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서술하였다. 이는 훗날 구체적인 수치로 입증되었다. 즉, 1908년 일본 군경의 교전 횟수와 교전 의병 수에서 전라도는 각각 25%와 24.7%를, 1909년에는 각각 47.2%와 60.1%를 차지하였다. 특히, 광주·전라남도는 참여 의병 수의 45.0%나 된다. 이는 1908년 이후 전라도 특히 광주·전라남도가 최대 의병 항쟁지였음을 보여준다.

[장성·나주에서 일어난 전기 의병]

동학농민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일본은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조선을 독차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러·독·프의 삼국 간섭으로 인해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 정세를 주시하던 민씨 정권도 친러 정책으로 기울었다. 일본은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비상 수단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 정권을 내세워 중단된 개혁[을미개혁]을 추진하였다. 을미개혁으로 태양력을 사용하고 근대적 우편 사무를 실시하였으며, 1895년 11월 15일을 기해 단발령을 내렸다. 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절정에 달하였고, 전국에서 의병이 세차게 일어났다.

동학농민운동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전라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나는 기우만을 중심으로 기정진의 문인들인 기삼연, 정의림, 고광순, 김익중 등의 유생이 앞장선 장성 의병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석진, 김창균, 박근욱 등 향리(鄕吏)들이 중심이 된 나주 의병이었다.

기우만(奇宇萬)[1846~1916]은 1896년 1월 인근 고을에 격문을 보내고 국모 시해와 단발령에 대한 원수를 갚고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는 임금을 모셔오자고 호소하였다. 기우만은 2월에 장성부의 향교에 들어가 거병한 후 나주로 달려가 나주 관찰부 참서관 안종수를 죽이고, 불안해하는 나주 의병을 격려하였다.

이 무렵 친위대 중대장 이겸제가 진주 의병을 진압하고 전라도에 들어와 해남군수 정석진을 죽이고 담양군수 민종렬을 체포하는 등 의병을 위협하였다. 또 남로선유사 신기선은 기우만에게 군대를 해산하라고 종용하였다. 이때 기삼연은 의병의 해산 종용은 임금의 뜻이 아니며 여기에서 군대를 해산하면 모두 화를 당한다고 반대하였으나, 기우만은 끝내 군대를 해산하고 말았다.

전라도의 전기 의병은 관군 및 일본군과 싸움 한 번 갖지 못하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으로 엄청난 살육과 약탈이 자행된 지 1년여 만에 다시 봉기하여 민족의 분노를 터뜨렸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을사늑약에 격분한 전라도 의병]

1905년 11월 일제 침략자들은 을사늑약을 강요해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그리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조선을 그들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국민들은 상소 활동, 자결, 언론을 통한 규탄, 밀사 파견을 통한 국권회복운동, 을사오적 암살 활동, 국채보상운동 등을 전개하였지만, 가장 격렬하고 적극적인 투쟁은 의병 항쟁이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전라도 의병 항쟁의 도화선은 1906년 6월 면암 최익현의 봉기였다. 전직 관료였던 최익현(崔益鉉)[1833~1907]은 당시 척사파의 우두머리로서 전국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최익현은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전라북도 태인에서 옥구 출신으로 낙안 군수 등 전라남도에서 관직을 지낸 임병찬을 만났다.

최익현과 임병찬은 4월 13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열어 일본이 저지른 죄 16가지를 성토하였다. 이후 그들은 정읍, 곡성 등지를 거쳐 순창에서 거병하였다. 그러자 흥덕의 고용진이 포수 30여 명을 거느리고 참여하였다. 4월 15일 정읍을 점령하여 무기고를 접수하였고, 16일에는 순창을 점령해서 부서를 새로 정하고 왜병 10여 명을 성 밖에서 격퇴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4월 21일 최익현 부대는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 병사들과 순창에서 대치하자 "동족끼리 죽이는 일은 차마 못하겠다."하여 싸움을 중단하고 무장을 해제하였다. 최익현은 임병찬 등 12명과 함께 토벌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일본군에 의하여 쓰시마 섬에 끌려가 순절하였다.

최익현의 봉기는 당초 기대했던 것만큼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기 당시 최익현 등이 전라남도 11개 군에 발송한 격문과 태인, 정읍, 순창 방면 등으로의 행군은 전라도 의병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 전라도 각지에서는 유생들이 중심이 된 의병 봉기가 여러 차례 있었다. 1906년 11월 백낙구가 구례에서 의병을 일으켜 광양·순천까지 진출하였고, 1907년 3월 화순에서 양회일 등이 의병을 일으켜 화순·능주·동복을 휩쓸었으며, 남원의 양한규는 고광순과 합심해서 남원을 점령하였다.

[의병 운동에서 의병 전쟁으로]

을사늑약 이후 의병 운동은 더욱 격렬해졌다. 1907년,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이에 1907년 8월 1일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은 자결로 이에 항거하였다.

평민 출신 의병장이 등장하면서 의병에 해산된 군인이 참여하고 농민들이 다수 참여하는 등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때부터 의병은 소규모 부대로 편성되어 지리적 이점과 민간인들의 협조로 일제 침략자와 토착왜구들을 응징하면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의병운동이 의병전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광주·전남에서의 의병은 1907년 9월 장성 출신 기삼연(奇參衍)[1851~1908]이 일으킨 ‘호남창의회맹소’부터 시작한다.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이 1908년 1월 2일[음력] 광주천에서 순국하자, 그 뒤를 김태원·김율 형제가 이었고, 김태원·김율 형제가 광주 어등산에서 또 순국하자 심남일, 안규홍, 전해산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양진여양상기는 부자(父子)가 의병장이었고, 김태원과 김율, 김원국김원범은 형제 의병장이었다. 이들이 이끈 의병부대가 전라남도 곳곳에서 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큰 타격을 주었다. 따라서 광주 어등산을 비롯한 광주·전라남도는 어디도 의병 항쟁지 아닌 곳이 없다.

일제는 1906년부터 1909년까지 전남 도내의 의병들을 토벌한 내용을 기록한 『전남폭도사(全南暴徒史)』를 남겼다. 이 책에서 일제는 1기[1906년 1월~1907년 12월]에는 최익현·고광순·기삼연이, 2기[1908년]에는 김태원[김준]·김율 형제가, 3기[1909년]에는 전해산·심남일·안규홍 등이 주도했다고 기록하였다.

제1기에 일제에 의해 수괴(首魁)로 지목된 최익현은 일군에게 체포된 후 쓰시마 섬(對馬島)에 끌려가 순국하였고, 기삼연은 1908년 1월 1일 체포된 후 1월 2일 재판 절차도 없이 광주천 서천교 밑 모래사장에서 총살되었다. 그리고 임진 의병장이던 고경명의 후손인 고광순은 ‘불원복(不遠復)’을 새긴 태극기를 부대기로 만들어 활동하다 지리산 연곡사에서 일군과 접전 끝에 전사하였다.

제2기에 수괴로 지명된 의병장은 나주 출신인 김태원·김율 형제 의병장이었다. 김태원은 1908년 4월 25일 광주 어등산에서 일군과 끝까지 싸우다 순국하였고, 동생 김율은 형의 시신을 확인한 후 일제에 의해 총살당하였다.

제3기인 1909년도에 수괴로 지명된 의병장은 함평 출신의 심남일과 보성 출신의 안규홍, 전라북도 임실 출신의 전해산이었다. 이 무렵 광주·전라남도는 최대 의병 격전지였다. 이들은 광주·전라남도 곳곳에서 일군과 항쟁을 벌이다 1909년 9월부터 실시된 ‘남한폭도대토벌작전’ 당시 체포되어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중 안규홍은 담살이[머슴]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보성 파청 등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광주·전남에서 활동한 의병들은 8대 의병장만은 아니었다. 의병에 참여하여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은 광주인들은 20여 명이나 된다[2020년 12월말 기준]. 김동수·김원국·김원범·임창모·조경환 의병장은 독립장을 받았고, 김재민·박원형·송학묵·윤영기·이기섭·임윤팔·신덕균은 애국장을, 김자술·박돌개·양동골·이경오·이운집은 애족장을, 조성학은 건국포장을 그리고 이문거는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남한 폭도대토벌 작전]

1909년 여름에 들어서도 의병 항쟁이 진정되지 않자, 일제는 지금껏 유례가 없던 대규모 군사 작전을 실시하였다.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작전의 대상은 광주·전라남도가 중심이 된 전라도 의병이었다. 1909년에 들어서면서 전국적으로 의병 투쟁이 이전에 비해 현저히 약화되는 추세를 보였으나, 광주·전라남도 지역에서는 오히려 의병들의 활동이 더욱 격화되었다. 이러한 광주·전라남도의 의병을 그대로 놔두고는 조선을 집어삼킬 수 없다고 생각한 일제는, 광주·전라남도 전 지역을 완전히 포위하여 의병을 섬멸하기 위한 작전을 실시하였다.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 보병 2개 연대 2,260명과 해군 수뢰정대 및 현지의 헌병과 경찰을 총동원하여, 전라북도 남부로부터 경상남도 하동 서쪽의 전라남도 전 지역을 토끼몰이하는 작전이었다. 즉,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은 남한 지역의 의병 소탕 작전이 아닌 ‘전남’이 중심이 된 전라도 의병 소탕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대구에 있는 일본군 한국 임시파견대 사령관에 의해서 지휘되었다.

제1경비부대가 포위망을 형성하고, 제2행동부대는 포위선 안에서 수색, 토벌, 검거하기 위해 미리 명부를 작성하여 20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를 조사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이 길을 나누어 호남 의병을 수색하니 위로는 진산, 금산, 김제, 만경으로부터 동으로 진주, 하동, 남은 목포로부터 사방을 포위한 것이 그물을 펼쳐놓은 것 같았다. 순찰병을 파견하여 촌락을 수색하니 집집마다 모조리 조사하여 조금만 의심해도 문득 죽이니 이에 행인들은 자연적으로 끊어지고 이웃 마을과 왕래하지 못하니 의병들은 셋, 다섯 도망하여 사방에 흩어지며 숨을 곳이 없게 되었다. 강한 자는 적진에 돌진하여 싸우다 죽었고, 약한 자는 꾸물거리다가 칼을 받았으며 점차 쫓겨 강진, 해남 땅에 이르러 갈 곳이 다하니 죽은 자가 무려 수천 명이나 되었다.”

이 작전으로 500여 명의 의병이 죽임을 당하였고, 1,687명이 체포되었다. 이때 심남일, 안규홍, 양진여 등 100여 명이 넘는 의병장도 체포되었다. 의병뿐 아니라 민간인들도 학살되는 등 인명, 재산상의 피해도 엄청났다. 전라도 의병 대토벌 작전으로 수많은 의병들이 살육당하고 체포됨으로써 전라도 지역의 의병 활동은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었다. 그것은 다른 지역의 의병 활동에도 영향을 미쳐 전국적으로 의병 전쟁의 전반적인 퇴조를 가져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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