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937 |
---|---|
한자 | 黃玹肖像-寫眞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물/서화류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수경 |
제작 시기/일시 | 1911년 - 황현 초상화 제작 |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6년 - 황현 초상 및 사진 보물 지정 |
현 소장처 | 장수황씨 종중 - 광주광역시 광산구 |
성격 | 초상화|사진 |
작가 | 초상화: 채용신|사진: 김진규 |
소유자 | 장수황씨 종중 |
관리자 | 장수황씨 종중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거주하는 후손이 소장한 우국지사 황현(黃玹)[1855~1910]의 초상화와 사진.
[개설]
황현의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이며, 세종대의 명재상 황희의 후손이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통분을 금하지 못하고 당시 중국에 있던 김택영을 만나 국권회복운동을 하려고 하였으나 망명에 실패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절명시 네 수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1850~1941]이 매천(梅泉) 황현의 초상화를 그렸다. 채용신은 1900년 50세가 넘어 태조 어진을 그리는 화사로 뽑히며 이름을 알렸고 이후 숙종, 영조 등 일곱 어진을 그렸다. 이후 90세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30여 년 동안 수많은 초상화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애국지사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이 초상화는 황현이 자결한 다음 해인 1911년 5월에 일찍이 황현이 1909년 천연당(天然堂) 사진관에서 찍어두었던 사진을 보고 추사(追寫)한 것이다.
[형태 및 구성]
황현의 사진은 1909년 개화파 서화가로서 황실 사진사로 활동했던 김진규가 천연당이라는 사진관에서 찍은 것이다. 사진 테두리 오른쪽에는 ‘매천거사의 55세 사진’이라고 쓰여 있다. 사진에 나타난 인물은 안경을 낀 얼굴에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채 의자에 앉아 있다. 옆에 놓인 좁은 서탁에 몸을 의지한 채 왼쪽에는 책을 펼쳐 놓고 오른손에는 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조금 어색해 보인다. 이런 식으로 서탁 위에 책을 몇 권 올려놓거나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모습은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사이에 흔히 볼 수 있던 초상 사진 자세이다.
황현의 초상화는 심의(深衣)를 입고 포대(布帶)를 맨 뒤 정자관(程子冠)을 쓴 모습이다. 도상(圖像)은 안경을 쓰고 오른손에는 부채를 들고 왼손에는 책을 든 채 바닥에 화문석 돗자리를 깔고 앉은 부좌상(趺坐像)이다. 살색의 얼굴, 안경 속에서 빛나는 눈동자, 날카로운 콧날 등이 우국지사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세는 거의 구분면(九分面) 정도에 가까울 정도로 약간 왼쪽으로 앉은 정면상에 가까운 모습인데, 이는 애초 황현이 찍은 사진의 취세(取勢)에서 온 것이며, 부채와 책을 들고 있는 것도 기본적으로 사진의 모습을 따르며 약간 변형시킨 것이다. 그러나 사진에는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뒤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쳐들고 있는 모습인데, 초상화는 심의를 입고 정자관을 쓴 뒤 화문석 돗자리를 깔고 앉아있는 모습으로 약간 바뀌어 있다.
[특징]
갓에 두루마기를 입은 사진 속의 황현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자세에 작고 마른 체구여서 다소 옹색하고 답답하게 보이는 데 반해 정자관에 심의를 갖춘 초상화 속 인물은 풍채가 당당하고 의연해 보이며 훨씬 자연스러운 자세로 부채와 책을 손에 쥐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붓끝으로 애국지사의 모습을 이상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노력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황현의 초상화는 살짝 왼쪽으로 틀어 앉았으나 거의 정면에 가까운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사진에 나타나 있는 모습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여기에 약간의 변형을 가하여 정자관에 심의를 입은 채 무릎을 꿇고 돗자리 위에 앉아있는 모습의 초상화가 탄생하였다. 검은색 둥근 안경을 낀 점과 오른손에는 부채를 왼손에는 노란 치자 물을 들여 홍실로 묶은 책을 들고 있는 것은 세부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사진과 거의 유사한 모습이다.
[의의와 평가]
황현의 초상화는 비록 그가 자결한 뒤 사진을 보고 추사한 작품이지만 인물의 모습을 실제와 같이 자세히 나타냈다. 사진과 초상화를 비교하면 이 사실을 더욱 확인할 수 있으며 치밀하고 정교한 묘사로 사진이 담아낼 수 없는 인물의 내면까지 형상화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