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동 용수마을 당산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370
한자 山水洞用水-堂山祭
이칭/별칭 산수동 용수마을 동제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제
지역 광주광역시 광산구 산수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지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중단 시기/일시 1945년 8.15광복 이후 - 산수동 용수마을 당산제 중단
의례 장소 할아버지당산 - 광주광역시 광산구 산수동 용수마을 동쪽지도보기
의례 장소 할머니당산 - 광주광역시 광산구 산수동 용수마을 서쪽지도보기
성격 마을 공동 제사
의례 시기/일시 정월대보름 날 저녁
신당/신체 할아버지당산[느티나무]|할머니당산[느티나무]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산수동 용수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정월대보름날 밤에 지내는 마을 공동 제사.

[개설]

산수동 용수마을 당산제정월대보름날 밤에 용수마을의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서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연원 및 변천]

용수마을은 조선시대에 나주의 북쪽에 있는 창고지라고 해서 북창(北倉)이라고 불려오다가, 일제강점기에 홍수 때마다 황룡강물이 범람하여 용수(龍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마을에 주민들이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말에 화순에 살던 창녕조씨(昌寧曺氏)가 의병 활동으로 쫓기는 몸이 되어 은신처를 찾아 이곳에 정착하여 개촌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당산제는 당산나무가 고사(枯死)하면서 8.15광복 이후 사라지고, 현재는 진행되고 있지 않다.

[신당/신체의 형태]

용수마을의 당산은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 2곳으로, 할아버지당산은 마을의 동쪽, 할머니당산은 마을의 서쪽에 있으며, 모두 느티나무가 신체이다.

[절차]

산수동 용수마을 당산제는 정월 10일경이 되면 제를 준비하기 위해 마을회의를 열어 화주 1명, 축관 1명, 헌관 1명 등 3명의 제관(祭官)을 선출한다. 화주는 그해 생기복덕(生氣福德)[생기법으로 본 길일과 사람이 태어난 생년월일의 간지를 팔괘로 나누어 가린, 길한 일진의 날]을 보아서 깨끗한 사람으로 선정하는데, 화주로 선정되면 석달 정도를 가려야 하였다. 제비(祭費)는 호당 거두었지만, 걸궁(乞窮)[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마을 집집을 돌아다니며 악기를 연주하거나 축원의 노래를 불러주는 일]을 통해 마련된 자금으로 충당하기도 하였다. 제기(祭器)는 매년 구입하여 사용하고, 제사가 끝난 뒤에는 화주가 사용하였다. 제물(祭物)은 돼지 한 마리, 명태, 삼실과, 삼채 등을 간단하게 준비하며, 돼지는 머리만 제사에 올리고 나머지는 마을굿을 치면서 동네에서 나누어 먹는다. 제물은 화주와 집사가 구입하며, 물건값을 깎지 않는다. 제수(祭需)를 장만할 때도 맛을 보지 않는다. 금줄은 제일(祭日) 3~4일 전에 당산 주변과 화주집에 쳐서 부정의 출입을 막는다.

정월대보름 날 초저녁이 되면 굿을 치며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제의 시작을 알린다. 저녁이 되면 화주집으로 가서 제물을 들고 할아버지당산으로 오르는데, 농악대는 뒤에서 굿을 치며 따라온다. 제차(祭次)는 유교식으로 치러지며, 제를 올린 후 소지, 음복, 헌식은 간단하게 한다. 이후 동일한 순서로 할머니당산에서 제를 지낸다. 제가 모두 끝난 후 마을을 돌며 다시 굿을 치고 논다.

[축문]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의 축문을 읊었다고 하나,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부대 행사]

당산제가 끝나면 다음날부터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마당밟이를 하는데, 보통 정월 그믐날까지 계속된다. 이때 걷어진 돈은 마을 자금으로 사용한다.

[현황]

산수동 용수마을 당산제는 당산나무가 고사(枯死)하면서 8.15광복 이후 사라지고, 현재는 진행되고 있지 않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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