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76
한자 光州市民-記憶-景陽―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경수

[정의]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 옛 시청 일대에 있던 경양방죽의 역사와 현황.

[수전농업을 위해 태어난 경양방죽]

경양방죽은 15세기 수전농업을 위해 축조한 인공호수이다.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 505번지 일대 6만 5000평[약 0.22㎢]이 넘는 규모였고, 1960년대 후반부터 21세기 초까지 광주시청이 있던 곳이다. 관개 지역은 중흥·신안동 지역으로 대략 120만 평[약 4㎢]이었다.

명칭은 국가 교통체제인 역원(驛院) 제도 중 경양역(景陽驛)에서 따온 듯하다. 주민들이 ‘개앙방죽’으로 불렀으며, 그 밖에도 금교방축(金橋防築), 경호(鏡湖), 서방지(瑞坊池), 연지(蓮池) 등 많은 별칭이 있었다. 1624년 광주목사를 지낸 조희일의 시의 제목에 경양언(景陽堰)이 등장한다. 양경우의 『제호집』에 경양방축(景陽防築)과 정약용의 시 「경양지를 지나면서[過景陽池]」에 전한다. 1872년 『전라좌도 광주지도』에 금교방축(金橋防築)이 그려져 있다. 1879·1926년 간 『광주읍지』에 경호(鏡湖), 1933년 『광주군사』에 서방지(瑞坊池)가 보인다. 1917년 1만분 1 지형도에는 연지(蓮池)가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 찰방역인 경양역(景陽驛)이 북쪽 우산동에 있었다.

[위치와 규모]

조선시대 광주읍성 동문과 북문에서 북쪽과 북동쪽 방향으로 직선거리로 1㎞쯤 떨어진 곳이다. 옛 광주 철도역과 동중학교 바로 북녘과 서녘으로 경양역과 담양 가는 길에 있었다. 북쪽 우산동 경양역촌과 풍향동 풍동마을에서 200~300m 거리에 자리했고, 북서쪽으로 경양역 역둔수전을 지나 태봉마을과 태봉산까지는 1㎞ 정도 거리이다. 광주제일고등학교 남측 어귀에 있던 공북루문에서 북동쪽으로는 약 700m를 가면 둑 남쪽 입구에 이르렀다.

방죽은 해발고도 30~40m 되는 평지에 남북 방향으로 길이 1㎞ 정도의 둑을 쌓아 물을 가두는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둑 안은 반달 또는 부채꼴 모양의 저수 공간이 형성되었다. 방죽을 채운 물은 무등산 장원봉 기슭에서 내려온 시냇물과 광주천에서 공급되는 봇물이었다.

방죽 동쪽 장원 계곡수는 풍향동 고사마을두암동 호두마을, 지산동 탑동마을동명동 원촌마을을 거쳐 유입되었다. 광주천 봇물은 조탄보[조참보] 취수문을 통해 보작촌, 광주읍성 서쪽과 북쪽 성벽, 대인동을 거친 뒤 경양호로 들어갔다. 옛 적십자병원 서측 입구에서 1.9㎞쯤 이어진 것이다.

경양방죽은 조선시대 축조 당시에는 7만 평[0.23㎢] 정도로 추정된다. 18세기 『여지도서』에 둘레 5,560척[약 1,685m], 깊이 1척 5촌[약 0.5m]으로 광주목 소속 44개 제언(堤堰) 중 가장 넓고 얕았다. 19세기 현 전라남도 지역에서 보면 나주목 우십교제[둘레 2,140m, 깊이 2m] 다음 크기였다. 20세기 초 일본인이 측량한 자료를 보면 65,418평[0.22㎢]이다.

[매립과 함께 역사 속으로]

경양호는 해마다 토사가 밀려들어 점차 수면이 낮아지고, 유입수로 양쪽 지면이 높아져 일부는 농경지로 변했을 것이다. 1920년대 말부터 도시 성장과 함께 광주천변을 중심으로 시가지 조성이 이루어지다가 1930년대 광주역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확대되면서 대규모 택지조성이 필요하다는 논의 끝에 1939년 4만여 평[0.13㎢]이 매립되어 1940년 2월 18일 대부분 대지로 변환되었다. 새로 조성된 택지 중 505번지 일대 64,443평[0.21㎢]은 1968년까지 505-1번지부터 505-1239번지까지 분할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 이촌향도(離村向都)[농촌을 떠나 도시로 옴] 현상과 함께 광주의 인구는 크게 늘어났다. 도시 기반시설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입인구 수용으로 경양방죽 주변의 환경이 악화되었다. 저수지 주변과 태봉산 일대는 생활하수가 방류되어 불량지구가 되었다.

1997년 『광주시사』 제4권에 보면 경양지구 주택조사업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경양지[경양방죽]는 광주시 소유 재산으로 인근 효죽, 계림, 산수, 동명, 지산동 주민들의 오수 및 하수도 처리장화가 됨에 따라 위생 및 도시미관상은 물론 일주빈민들의 무질서한 판자집들이 난립되어 있어 광주시에서는 공공복리 증진과 시민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경양지를 매립하여 택지로 조성하였다. 사업지구의 위치는 광주시 동구 계림동 505-328 일대이며, 1967년 7월 11일 사업인가를 받았으며, 공사기간은 1967년 5월 17일~1968년 6월 30일이었다.”

경양방죽 매립에는 많은 흙이 필요하였다. 지금같이 도로시설과 대형트럭이 없었던 당시에는 되도록 가까운 곳의 토사를 가져다 메꾸는 것이 경제적이었다. 태봉산은 역전 이전으로 도로 개설 노선에 물려 있어 허물어 내는 수밖에 없었다. 파낸 자재는 당연히 매립토로 활용되었다. 경호대 능선도 지형 변화가 불가피하였다.

1973년은 경양호가 매립되었고, 505-900번지에 광주시청광산동에서 이사와 신시가지가 조성되어 새 집들이 지어졌다. 건축설계사무소가 12곳이 있었고, 의료기관 8곳, 숙박업소 4곳도 있었다.

[경양방죽과 함께 사라진 태봉산]

1933년 『광주군사』에 따르면 만두산(饅頭山)으로 여긴 태봉산 일대는 8.15광복 이후 광주 최초 계획적인 도시개발 사업인 제1지구 사업지구가 되었다. 2000년 출간된 『광주토지구획정리백서』를 보면 1958년부터 시작된 사업지구는 동쪽 경양지 매립지 서편, 서쪽 임동성당, 남쪽 북성중학교 동편과 광주철도역사에 이르기까지 444,156.2평[1.47㎢]이었다(택지 248,155.4평 55.9%, 신역부지 62,157평 13.9%, 도로 131,034.9평 29.5%, 공원 1,517.4평, 시장 1,291.5평). 행정구역으로 보면 중흥동, 신안동, 유동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태봉산 주변에는 40채의 가옥이 있었다.

이 사업의 목적은 1939년 일제강점기에 수립된 도시계획의 연장선상으로 6.25전쟁 이후 인구유입 성장과 주택문제 해결을 위한 도심 관통 철도를 외곽으로 이전하려는 데 있었다. 이 지역은 남동쪽 시내와 경양지 매립지구로 연결되는 곳이며, 북동쪽 31사단, 북서쪽 전남대학교, 남서쪽 광천공단과 아시아자동차공장 건립터로도 통한 곳이다. 1938년 간행된 『조선의 임수』를 토대로 2007년 '생명의 숲 국민운동'에서 펴낸 자료를 보면 연장 1,000m, 폭 10m에 양쪽에 열을 지어 팽나무와 왕버들이 있었고, 최대 흉고직경(胸高直徑)[자라는 나무의 뿌리부터 1.3미터 되는 부분의 나무줄기의 지름]은 40㎝였다고 적고 있다. 계림동 505-126번지에는 광주 최초 아파트인 미도(美都)가 있었다.

1982년 발행된 『광주의 얼』의 「잃어버린 경승」 편에 태봉산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태봉산은 시가지의 서북방 신안동[구 서방면 중흥리] 광주 신역 옆에 있던 높이 30m, 넓이 약 1정보[9,917㎡]쯤 되는 무덤같이 둥글납작한 산이었다. 태봉산은 광주시민들의 많은 반대와 우여곡절 끝에 헐리게 되었는데, 광주의 연로한 어른들의 반대 이유는 경관의 훼손 이외에도 지리풍수설을 들었다. 즉, 광주시내 쪽으로 뻗은 무등산의 두 줄기[지산동 뒷산 줄기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까지 벋은 산줄기]가 마치 뱀의 형국이며, 이 뱀들은 여의주가 있어야 승천하여 용이 되는데, 그 여의주가 곧 태봉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태봉을 헐면 뱀의 승천길이 막혀 광주는 발전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광주광역시청은 2004년 치평동으로 옮기고, 2008년 홈플러스가 문을 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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