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63
한자 陶瓷藝術硏究-忠孝洞-
영어공식명칭 Chunghyo-dong kiln led the study of ceramic art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풍암제길 14[금곡동 157]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정민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금곡동 일대에서 확인된 가마터.

[개설]

광주 충효동 요지는 1963년 발굴된 가마터이다. 우리나라 분청사기의 변화·쇠퇴 과정뿐 아니라 분청사기에서 백자로의 이행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터이다.

[조사 과정]

충효동 가마터는 1961년 국립박물관[현 국립중앙박물관] 임천의 조사 보고를 통해 그 규모와 성격의 일부가 처음 소개된 이후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공식적인 발굴조사는 1963년 5월 예비조사를 거쳐 1963년 6월 19일부터 7월 16일까지 최순우·정양모·김정기·김동현으로 구성된 국립박물관 조사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는 국립박물관이 실시한 최초의 가마터 발굴조사였다. 이후 유적의 중요성에 비추어 1964년 8월 29일 사적 제141호로 지정되었다. 본래 사적 명칭인 '광주충효동도요지'는 2011년 7월 28일에 '광주 충효동 요지'로 변경되었다. 1963년도 조사 경과는 1964년에 약식 보고를 통해 소개되었고, 이후 1986년에 출토품을 보관·정리할 수 있는 여건이 이루어지면서 1991년 국립광주박물관이 실시한 발굴조사를 참조하여 1992년에 정식 보고서를 출간하였다.

그러나 1963년에 발굴한 것 이외에 주변에 있는 가마터에 대한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인식한 광주직할시[현 광주광역시]에서는 충효동 가마터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기획하고 이를 국립광주박물관에 의뢰하였다. 발굴조사는 1991년에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1차 조사는 4월 8일~5월 31일, 2차 조사는 11월 21일~12월 20일에 실시되었다. 두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서 모두 3기[1호~3호]의 가마를 발굴하였고, 그 가운데 한 기의 가마[3호] 아래 또 다른 하나의 가마[4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4호 가마 위 3호 가마는 백자 전용이었음이 밝혀졌다. 1991년 발굴조사에서는 400여 포대에 이르는 막대한 수량의 도자기 파편을 수습하였는데, 이를 통해 충효동 가마에서 생산되었던 도자기의 전체적인 면모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1991년 발굴조사 이후 1993년 3월 19일부터 28일까지 광주시청의 주관 아래 충효동 요지 보호각 건립 공사를 위한 기초자리 출토유물 수습 조사가 국립광주박물관의 협조로 이루어졌고, 분청사기와 백자 파편 20여 포대가 출토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2000년 광주시립민속박물관[현 광주역사민속박물관]에서 실시한 무등산 가마터 지표조사 가운데 충효동 요지 맞은편 북동쪽에 있는 금곡동 금곡 뒤 가마터에서도 전형적인 충효동 분청사기의 특징을 갖춘 상감·인화 분청사기 등과 요업 도구가 수습되어 금곡 일대의 가마에 일정한 도자기의 양식이 구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마의 구조와 변화 양상]

충효동 가마터에서는 총 4기의 가마가 조사되었다. 1호 가마는 봉통에서 가마로 연결되는 벽면과 가마 바닥 일부가 확인되었다. 봉통부는 길이 211㎝, 너비 172㎝ 크기의 타원형으로, 진흙을 사용하여 축조하였으며 불길이 올라가는 벽면은 수직 높이가 72㎝이다. 가마 바닥의 전체 폭은 130㎝ 내외로 가마의 윗부분과 길이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터널식 가마로 추정된다. 퇴적구에서 수습된 도자기를 통해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2호 가마는 거의 완전하게 노출된 가마이다. 봉통부를 포함한 총길이 20.6㎝, 폭 1.3m 내외로, 옛 지면을 파내고 구축한 반지하의 터널식 가마이며, 소성실의 바닥 경사도는 13도이지만 출입시설이 있는 곳은 수평에 가깝다. 봉통부는 진흙과 돌을 이용하였으며, 크기는 길이 160㎝, 폭 170㎝ 정도로 원형에 가깝다. 봉통과 가마의 소성실로 연결되는 벽면의 수직 높이는 96㎝이다. 가마벽은 진흙에 일부 돌을 섞었으며, 두께는 3~6㎝ 정도이다. 벽의 높이는 최고 70㎝, 최하 20㎝ 정도 남아 있다. 출입 시설은 서쪽 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6개가 있으며, 폭은 40~45㎝ 정도이다. 가마 끝에서는 연도부와 관련된 타원형 시설이 확인된다.

3호 가마는 봉통부와 소성실이 잘 남아 있다. 봉통부 크기는 길이 275㎝, 폭 155㎝ 정도이며 평면 방형에 가깝고 1호와 2호 가마의 봉통에 비해 돌을 많이 사용하였다. 소성실은 윗부분이 유실되었는데 길이 24m, 폭 130~140㎝ 정도로 추정된다. 소성실 바닥의 경사는 12~15도이고, 출입 시설이 있는 곳은 수평에 가깝다. 출입 시설은 250~270㎝ 간격으로 8개가 확인된다. 가마벽은 진흙을 사용하였고 안쪽에는 손과 붓을 이용하여 백토를 발랐다. 층위 관계로 보아 4기의 가마 중 가장 늦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4호 가마는 3호 가마의 바닥 흔적이 끝나는 지점에 몇 개의 돌이 반원형의 구조를 이루고 있어 그 아래를 파 내려가 돌과 연결되는 유리질화된 벽이 확인되었고, 약 30㎝ 깊이에서 회갈색으로 굳은 바닥이 드러났다. 아울러 3호 가마의 소성실 중간에 바닥이 유실된 곳을 탐색하여 30㎝ 깊이에서 모래가 깔린 바닥과 벽이 나타나 3호 가마와 중첩된 가마로 추정되었다. 또한, 4호 가마의 굴뚝부로 추정되는 끝부분은 돌과 진흙을 섞어 만들었다.

충효동 요지는 가마의 층위 관계와 출토 유물로 보아 1-2-4-3호 가마의 순서로 조업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충효동 가마를 통해서 분청사기의 변화·쇠퇴 과정뿐 아니라 분청사기에서 백자로의 이행 과정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가마 구조의 변화 양상 역시 추론할 수 있다.

먼저 가마 축조 재료의 변화상을 파악할 수 있다. 1호 가마는 붓돌을 제외하고는 진흙을 사용하였고, 2호 가마는 봉통부의 왼쪽 벽을 돌과 진흙을 섞어 쌓았지만 극히 일부 가마 벽에 돌을 섞어 사용하였다. 3호 가마는 봉통부의 오른쪽 벽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돌과 진흙을 섞어 쌓았다. 4호 가마는 굴뚝부로 추정되는 끝 부분도 벽을 돌과 진흙을 섞어 축조하였다. 비록 봉통부와 가마 끝 부분에서 확인되는 변화이지만, 진흙으로 축조하던 것에서 돌과 진흙으로 섞어 쌓는 방법으로 재료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돌과 진흙을 섞어 쌓는 방법은 16세기 전반에 운영되었다고 추정되는 안양 산본동 백자 가마와 광주 번천리 백자 가마에서도 나타난다.

두 번째는 봉통부의 변화이다. 보수가 많이 이루어진 2호 가마와 유실이 많이 된 4호를 제외하면, 봉통부의 평면이 1호 가마는 타원형, 3호 가마는 모를 죽인 장방형인데, 모양이 변하면서 평면의 면적이 넓어지고 있다. 봉통 천정의 높이는 알 수 없지만, 평면의 면적이 넓어진 것으로 보아 봉통의 공간이 확대되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봉통부의 공간 확대 외에 또 다른 변화는 봉통 앞 벽의 경사가 완만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 역시 안양 산본동은 55~58도, 광주 번천리는 30도로 시기가 변함에 따라 완만해졌는데 이는 전국적인 현상이다.

세 번째는 터널식 가마에서 칸 가마로의 변화이다. 고려 시대의 가마는 터널식 가마가 주를 이루는데, 고려 말에 칸 가마가 발생하여 조선 시대에는 대부분 칸 가마가 유행하였다. 가마 구조의 변천 과정으로 보아 15세기 중엽에 사용한 2호 가마와 1480년 이후에 사용한 3호 가마가 단실(單室) 가마의 전통을 지킨 마지막 가마이며, 15세기는 단실 가마에서 칸 가마로 이행되는 과도기라 추정된다.

네 번째는 2호 가마 끝의 굴뚝부라 추정되는 웅덩이와 같은 유규의 존재이다. 가마는 그 자체가 경사를 지녀 봉통부는 낮고 굴뚝부는 높다. 이러한 가마의 구조적 특징 때문에 굴뚝부가 확인된 가마는 찾아보기 어렵다. 2호 가마에서 확인된 가마 끝의 유구는 우리나라 도자기 가마에서는 처음 발견된 구조이다.

이와 같이 충효동 1·2·4·3호 가마는 축조 재료, 봉통부와 소성실의 구조 등에서 고려 청자 가마와 조선 백자 가마의 교량 역할을 하고 있다.

[출토유물의 변화 양상]

충효동 분청사기의 변화 양상은 출토품의 주종을 이루는 대접과 접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분청사기는 그릇의 형태·무늬·굽는 방법 등에서 크게 6단계로 변화되었음이 확인되었다.

1단계는 E2~W1 지역에서 출토된 것이다. 충효동에서 제작된 분청사기 가운데 최고급품이다. 바탕흙은 정선되어 입자가 매우 치밀하며, 유색은 밝은 회청색을 띠고 광택이 있다. 그릇 면에 무늬를 넣은 기법은 인화 기법이 주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대접과 접시를 제외한 각종 그릇에서 상감·박지 기법을 이용한 조각들이 상당수 발견되었다. 대접과 접시는 인화 기법으로 전면에 가득 무늬가 베풀어져 여백이 거의 없으며, 중심 무늬대의 폭이 아주 넓다. 음각 명문은 대부분 굽 안에 있으며, 큰 접시의 안 바닥에는 상감된 '무진내섬(茂珍內贍)’ 명문이 있다. 이 접시는 분청사기의 제작 시기를 추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각각의 대접과 접시는 갑번으로 굽다리의 접지면에 가는 모래가 붙어 있다. 분청사기 외에 적은 양의 청자와 백자가 함께 출토되었다. 이들은 기형상 차이가 있으며, 백자는 W2 지역에서 출토된 것과 같이 섞인 것으로 여겨진다.

2단계는 W3 지역에서 출토된 도자기로, 2호 가마에서 제작하였다고 추측된다. 앞에 서술한 분청사기와는 무늬 구성이나 굽 처리, 굽는 방법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바탕흙에는 미량의 모래 알갱이가 섞여 있으며, 유색은 녹색이 약간 감도는 회청색을 띤다. 대접과 접시의 중심 무늬대 폭이 좁아져 그 사이에 여백이 있으며, 국화문의 열이 일정하지 않고 개체 또한 크다. 무늬 위를 백토로 분장한 후 깨끗이 닦아내지 않아 무늬 이외의 부분에 백토가 남아 있다. 안 바닥과 굽 안에 바탕흙비짐눈 흔적이 남아 있어 포개구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접과 접시를 제외한 각조 그릇에 상감이나 박지 기법보다 조화 기법으로 무늬가 베풀어진 것이 많다.

3단계는 W2 지역 9~7층에서 출토된 것이다. 바탕흙은 거칠어져 모래 알갱이가 섞이고 기포가 있다. 그 색깔은 밝은 회청색보다 회갈색·회흑색 ·흑색을 띤 것이 많다. 유색은 밝은 회청색을 찾아보기 어렵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녹색이 감도는 회청색을 띤다. 대접과 접시는 크기가 작아진다. 무늬는 앞 단계에서 나타나지 않은 승렴문이 각종 그릇에 표현된다. 그리고 상감이나 박지 기법은 거의 이용되지 않고 조화 기법 위주이다. 구울 때 바탕흙비짐눈으로 모두 포개구이하였다. 비짐눈은 대부분 3개 정도 이용되었다. 명문은 대부분 굽 안에 음각되었는데, 공(公)·귀산(貴山)·산(山)·전(田)·마(馬) 등이다. 이 단계에서부터 백자가 생산되고 있다. 아직은 적은 양으로 전체의 5%에 불과하지만, 8층에서는 4.2%, 7층에서는 7.8%를 차지하고 있어 점점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자는 분청사기와 달리 모두 갑번을 이용해 제작되었는데, 이와 같은 경우 실패율이 낮아 실제로는 이보다 많은 양이 제작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출토된 많은 양의 갑발에 의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4단계는 W2 지역 6층에서 출토된 것으로 아래층과는 제작상의 큰 변화를 보인다. 먼저 바탕흙 안에 많은 모래 알갱이가 섞여 거칠다. 유약은 반투명유로 탁하고, 녹색이나 회색이 짙게 나타난다. 굽다리의 두께가 1㎝가 넘는 것이 대접의 경우 전체의 80%를 넘어 아래층과 많은 차이가 있다. 또한, 굽과 굽 안 바닥이 이루는 경사도 완만한 것이 대부분으로, 굽을 보다 손쉬운 방법으로 깎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늬는 상감이나 박지 기법에 의한 것이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대접과 접시에는 인화 기법이, 그리고 기타 각종 그릇에는 조화 기법이 이용되었다. 대접과 접시는 중심 무늬대의 폭이 현격하게 줄어들어 그릇 면에 여백이 증가한다. 무늬 위를 백토 분장한 후 닦아내지 않아 귀얄 자국이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접의 옆 경사면 무늬대는 바깥 면이 4단인 것은 발견되지 않으며, 안팎 면이 모두 3단으로 구획되어 있다. 접시도 바깥 면이 종속문으로 이루어진 2단 구성이다. 그리고 안쪽 면 중심 무늬대의 국화문도 1줄만 돌려져 있어서 그 사이의 여백이 많다. 명문도 내용과 위치, 그리고 나타내는 기법 등에 많은 변화가 있다. 내용은 광(光)·광별(光別)·광상(光上)·광이(光二)·정삼(丁三)·정사(丁四)·정윤이(丁閏二)·정삼별(丁三別) 등인데, 광(光)자와 정(丁)자가 들어간 것이 대부분이다. 이들 명문은 안 바닥과 굽 안에 있는데, 광(光)자가 들어간 것은 안 바닥에 도장으로 찍었고, 정(丁)자가 들어간 것은 굽 안에 음각하였다. 대접과 접시를 제외한 각종 그릇에 나타난 무늬는 잎과 꽃이 큼직하게 표현된 모란문이다. 그 표현에 있어서 간략한 선으로 윤곽만 나타냈기 때문에 섬세한 면을 찾을 수 없다. 모란문 이외에 게와 가재가 새로운 무늬 소재로 등장하는데, 대체로 제기류의 안팎 면에 듬성듬성 베풀어져 있다. 이 밖에 순수하게 귀얄로 분장된 것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대접과 접시의 20%를 차지한다. 백자의 생산도 늘어나 전체 도자기의 15%를 차지하며, 이 가운데 50% 정도가 갑번으로 제작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6층에서 출토된 분청사기는 제작 방법에 있어 큰 변화가 보이고 있다. 전반적으로 외형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실용성이 강조되어 제작 수량도 앞선 단계보다 크게 증가되었다. 이렇게 수요가 늘어남에 따른 대량 생산을 위해서는 제작의 간편화가 요구된다. 하지만 백자는 갑번에 의한 고급품으로 상류 계층의 수요에 우선적으로 충당되었을 것이다. 반면에 분청사기는 점차 서민층으로 수요 집단이 바뀌어 감에 따라 요업 형태가 대량 생산 체제로 변화되어 가고 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5단계는 W2 지역 3층에서 출토된 것으로, 충효동에서 제작된 인화 분청사기의 최후 단계이다. 그릇은 앞 단계와 유사한 형태이나 바탕흙이 더욱 거칠어져 모래와 잡물이 섞이고 많은 기포가 있다. 귀얄로 백토 분장된 면이 아주 얇아 바탕흙이 대부분 드러나 보인다. 유색은 탁한 회색으로 광택이 없다. 대접과 접시의 굽은 거칠게 깎아 굽 폭의 차이가 심한 것이 전체의 50%를 차지한다. 중심 무늬대는 대접의 경우 국화문 1~2줄을 돌려 무늬대 사이에 여백이 많아진다. 또 바깥면의 종속문인 연판문마저 생략된 것이 대접은 25%, 접시가 60%에 이른다. 각각의 무늬는 얕게 인화되고 귀얄로 백토 분장한 후 닦아내지 않아 선명하지 않다. 대접과 접시를 제외한 각조 그릇에 나타나는 무늬는 6층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다만 물고기 무늬가 큰 발형에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귀얄로 백토분장되고 무늬가 없는 것이 많아지는데, 분청사기 대접과 접시의 40%를 차지하여 6층보다 20%가 증가되었다, 백자는 앞 단계와 비슷한 양인 15%를 차지한다.

6단계는 W2 지역 2층에서 출토된 것으로 무늬가 없는 귀얄 분청사기가 주종을 이룬다, 그릇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으며 기벽이 얇고 강도가 약해 쉽게 부서진다. 대접과 접시를 포개어 구울 때 바탕흙비짐눈과 모래비짐눈이 이용되었는데, 모래비짐눈이 80%를 차지한다. 굽의 형태에도 많은 변화가 있다. 굽다리의 모서리가 각이 지고 접지면 폭이 7㎜ 이상이며 단정하게 깎여진 굽이 전체의 50%를 차지한다. 이와 같은 굽은 이 층에서 출토된 백자의 굽과 형태가 같다. 굽 지름도 줄어들어 6㎝ 내외이다. 백자의 생산량은 37%로 급격히 늘어나 이곳 가마가 백자 생산 체제로 점차 변해가고 있으며, 백자의 시대로 이행하는 서막이 열린 것이라고 추측된다.

[가마 운영 시기]

충효동 가마의 제작 활동 시기는 문헌 기록, 편년이 가능한 유물, 충효동 출토품 등을 통해 살필 수 있다. 그 활동은 유물의 변화 과정을 따라 변천하였을 것이다.

첫 번째 단계로, E2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은 충효동 가마의 시작을 말해 준다. 먼저 문헌 기록을 통하여 대략의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1424년부터 1432년 사이의 조사 내용인 『세종실록』의 「지리지」에 의하면, 군의 동쪽 이점(梨岾)에 자기소 한 곳이 기록되어 있으며 품질 표시는 없다. 이곳은 현재의 지명으로는 배재를 의미하며 광주에서 충효동으로 넘어오는 고개이다. 따라서 당시 기록된 가마가 이 일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오늘날 배재에서 금곡마을에 이르는 골짜기에는 발굴조사된 충효동 가마터 외에 여러 기의 분청사기 가마터가 남아 있다. 이들 가마터에서 출토된 분청사기는 흑백상감의 연당초문과 삼원문·육원문 등의 무늬가 있어 분청사기의 초기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분청사기는 대체로 1420년 이전의 상황으로 이해되며, 그 예로 1400~1420년경으로 추정되는 공안명(恭安銘)의 분청사기 연당초문 대접이 있다. 따라서 지리지에 나타난 자기소는 발굴 조사된 충효동 가마터로 여겨지며, 여기에서 제작한 고급 분청사기가 중아 관청에 토산공물로 보내진 것이다.

다음은 두 번째와 세 번째 단계의 제작 시기이다. 편년이 가능한 유물로는 덕녕명(德寧銘)의 분청사기 국화문 접시가 있다. 덕녕부(德寧府)는 존속 기간이 1455~1457년으로 15세기 중엽의 분청사기 이해에 중요한 자료이다. 이 접시는 크기·형태·무늬 배치 등이 충효동에서 출토된 접시와 같아 제작 시기의 추정이 가능하다. 이 접시는 2호 가마에서 제작된 W3 지역 퇴적층과 W2 지역 9~7층에 걸쳐 출토되고, E2 지역과 W2 지역 6층 이상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2호 가마에서 제작된 W3 지역과 4호 가마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W2 지역 9~7층 출토 유물은 1457년을 전후한 어느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네 번째 단계인 W2 지역 6층에서 출토된 분청사기이다. 덕녕부명 접시와 같은 접시가 발견되고 있지 않아 1457년 이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층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광(光)자를 통해서 그 상한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광주는 1430년에 무진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451년에 다시 광주목으로 복귀된다. 분청사기에 나타나는 광(光)자는 광주목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볼 때, 이 층에서의 출토품 제작 시기는 1451년 이후가 된다. 그리고 하한 시기는 3층에서 출토된 성화명(成化銘) 묘지로 추정이 가능하다. 묘지의 내용에 따라 두 가지 방법으로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먼저 묘지 앞면에 적힌 화정유(化丁酉)를 성화 정유년(丁酉年)으로 해석하여 그 인물이 세상을 떠난 해로 본다면, 6층 출토품은 1477년 이전에 제작된 것이다. 다음은 뒷면에 상감된 내용을 성화십(成化十)으로만 해석한다면 성화 19년이 하한으로 1483년이 된다.

다섯 번째 단계는 W2 지역 3층으로, 성화명 묘지가 출토된 곳이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묘지의 시기 폭을 넓게 잡으면 이 층이 형성된 시기는 1477년에서 1483년 전후 시기임을 알 수 있다.

끝으로, W2 지역 2층의 제작 시기이다. 충효동 가마의 최후의 활동 시기나 제작 시기를 추정할 만한 편년자료는 없다. 그러나 전체적인 퇴적 상황으로 보아 오랜 기간 동안 제작 활동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W2 지역의 퇴적층 가운데 가장 두꺼운 층인 6층이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약 20~30년에 걸쳐 쌓인 것이라면, 이보다 퇴적층이 얇은 2층은 시기 폭이 더 짧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제작 시기를 추정하면 성화명 묘지의 시기보다 뒤인 1490년을 전후한 때부터 약 20년간인 1510년경까지 제작 활동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충효동 가마의 제작 활동 시기는 앞서 살펴본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 볼 때 대략 143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시작하여 16세기 초까지로 추정된다. 따라서 전체 가마 운영 기간은 70~80년간으로 여겨진다.

[역사적 의의]

충효동 가마터는 우리나라 분청사기 가마터 가운데 최초로 이루어진 본격적인 학술조사라는 점과 이 유적을 통해 분청사기의 변화·쇠퇴 과정뿐 아니라 분청사기에서 백자로의 이행 과정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큰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아직 미흡한 실정임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 분청사기의 편년적인 발달사를 밝혀 줄 수 있는 중요한 열쇠를 지니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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