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C02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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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 신동(새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권삼문 |
약 600년전(1424년경) 강릉유씨(江陵劉氏[劉仁悌, 字 而恭, 號 松齋, 大提學]가 인동(仁同) 고을에 처음 들어와 정착하였다. 뒤이어 함안조씨(咸安趙氏)[趙淵, 字 靜鄕, 號 耐軒, 贈 戶曹參議]가 이거(移居)해 왔다.
1580년경 인동장씨(仁同張氏)[張顯道, 字 德優, 號 月浦 贈 吏曹參判]가 이거해 와서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게 되면서,‘새월(새올)’즉 신곡(新谷)이라 불리게 되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882)에 의하면 신동은 인동군 읍내면에 속하는 내신촌(內新村)과 외신촌(外新村)으로 나타난다.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따르면 역시 인동군 읍내면에 속하는 신동은 내신촌, 외신촌과 동면(東面) 석사동(石寺洞) 일부를 포함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1961년 관보 제2837호에 게재된 ‘고시할 표준지명’에 따르면 신동은 안말과 바깥말로 이루어져 있으며 저수지로 학서지와 신동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 위치는 다음과 같다.
〈표〉1961년 관보 제2837호에 게재된 신동에 관련한 고시 표준지명
무라야마 지준[村山知順]의 『조선의 취락』(1938)에 의하면 1930년 당시 신동(칠곡군 인동면)은 마을 발생 이래 200년이 지났고, 총호수 123호 가운데 장씨는 73호이고 장씨가 아닌 가구가 50호였다. 장씨의 인구는 440명, 장씨가 아닌 사람들은 273명이었다.
1988년경에는 총 70가구 중 인동장씨 40호, 경주김씨 5호, 강릉유씨 5호, 밀양박씨 5호, 기타 15호이었다.
인동장씨는 오늘날까지 종파(宗派), 남산파, 황상파, 중리파[칠곡] 등이 현지에 거주하고 있다. 종파와 남산파는 인동의 중심지이자 관아의 소재지였던 인의동 일대에 주로 거주하였다. 특히 인동장씨의 대종택과 남산파 종택에서 불과 10리 내외인 신동은 인동장씨의 세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다. 남산파는 물론 인동장씨 전체의 현조로 떠오른 여헌 장현광의 후사를 이은 장응일도 이곳 신동 출신이다. 신동 출신이 남산파의 종손으로서 그 맥을 이어간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음력 정월 보름 마을총회를 열고, 5월 8일 어버이날에 어버이잔치를 성대하게 열고 있다. 범죄 없는 마을로 지정된 것을 자랑으로 삼으며 아직도 ‘촌인심’이 살아 있음을 자랑한다. 인동에서 신동 사이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도시화가 진행되었지만 신동은 여전히 농촌마을로 남아 있다. 마을 내에는 교회가 없으며, 절은 천생산 자락에 있는 천룡사가 가장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