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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판’마을의 최씨 어른과 장씨 어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A030201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재호

2007년 3월 현재 해평 마을의 총 가구수는 129가구, 총 인구수는 315명이다. 예전부터 해평 마을은 흔히 ‘최장판(崔張版)’이라고 할 정도로 최씨와 장씨가 세거하였다. 하지만 오늘날은 외지로 많이 이주하여 전주최씨가 16가구, 옥산장씨가 13가구 정도이다. 그 외에 경주이씨, 한산이씨, 선산이씨들이 20가구이며, 경주김씨, 김해김씨, 선산김씨들이 16가구이다. 안동고씨가 3가구 있는데 낙봉서원에 배향된 고응척(高應陟) 선생의 후손들이다. 윤보선 대통령과 한 집안인 해평윤씨가 2가구이고, 파평윤씨가 3가구이다. 순흥안씨는 5가구로 일제강점기부터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마을 총 129가구 중에서 농업가구는 오늘날 50%가 되지 않는데, 그 중에서도 여성인구가 반을 훨씬 넘고, 대부분 고령 단계의 노인들이다. 74세의 한 할머니는 노인회에서 총무직을 맡아서 상노인들의 수발을 들고 있으며, 66세에 이른 한 분은 환갑이 지났지만 훨씬 나이 많은 분들이 모두 노인회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가입을 할 수 없어 아직까지 청년회에 남아 있는 상황이다. 이런 까닭에 넓은 들이 있지만 이모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극심한 노동력 부족현상 때문이다. 마을에서 가장 젊은 농민이 51세이다.

‘최장판’이라 불리는 해평 마을에서 최씨 어른과 장씨 어른이 살아 온 이야기를 들어 보자. 먼저 전주최씨 500년 가계를 잇고 있는 최씨 어른(최열)은 1935년에 해평에서 태어났다. 해평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 시절부터 오랜 기간 마을을 떠나 외지에서 생활했다. 당시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통합되어 있던 시기라 경북중고를 졸업하였으며 경북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1남매(9형제 2자매) 중에서 차남이지만 형이 6·25사변 때 학도병으로 끌려가 행방불명되어 실질적인 맏이 역할을 해왔다. 한때 고시 준비를 하기도 했지만 양조장을 운영해 온 부친께서는 성정이 심약하고 동생들은 많은 관계로 아버지는 자신을 도와 최씨 어른이 동생들 교육을 돕기를 바랬다. 그 후 서울에서 장사를 한 적도 있는데, 그 덕에 아이들은 서울서 학교를 다녔다. 40대 말에 하향하여 사립학교에서 행정업무를 보기 시작해, 정년퇴임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재 최현 선생의 후손으로 마을에 대한 이모저모를 소상히 알고 있다. 부인은 봉화군 법전면의 진주강씨이다.

장씨 어른(장상용)은 마을의 주요 살림을 도맡아 해오셨다. 1935년에 출생하였으며, 장천면의 오상중고를 졸업하였고, 경북대학교 문리대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강원도와 경상북도 문경 가은의 탄광회사에서 근무하기도 하였으며, 선산읍의 법원지원에서도 근무하였다. 부친이 해평 면장을 역임하였다. 새마을회의 총무를 현재 맡고 있으며, 새마을회를 비롯한 관청과 관련된 마을일을 많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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