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A030103 |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재호 |
조선시대 중·후기 대표적인 해평 지역의 명현은 『일선지(一善志)』를 남긴 인재(訒齋) 최현(崔晛)이다. 인재(訒齋) 최현(崔晛)은 검재 최수지의 4세손이다. 증좌참찬(贈左參贊) 심(深)의 아들로, 해평에서 1563년(명종 18)에 태어났다. 인재에 대한 전주최씨 족보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소시(少時)에 학봉(鶴峰)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고 후에 한강(寒岡) 선생에게 사사(師事)하여 유학의 진수를 터득하였다. 학문과 문장으로 세상에 명성을 떨치었으며 44세 때 문과에 급제하고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갔을 때 명으로부터 『대학연의(大學衍義)』, 『소대전칙(昭代典則)』을 들여왔다. 만년(晩年) 10여년을 전라도 무주에서 지내다가 졸(卒)하니 향년 78세. 왕이 예조좌랑(禮曹佐郞) 장응일(張應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증순충보조공신(贈純忠輔祚功臣)하고 봉(封) 완성군(完成君) 하였다. 후세에 유현(儒賢) 학문의 탁월(卓越)로써 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양관대제학(兩舘大提學)하고 증시(贈諡) 정간공(定簡公)하였다. 시주(諡註)에는 순행불상(純行不爽)은 정(定)이오 정직무사(正直無私)는 간(簡)이라 하였다. 송산서원(松山書院)에 배향되다. 저작으로 문집 12권, 일선지(一善誌) 4권이 있으며, 동국통감(東國通鑑)은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행장(行狀)을,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가 묘지(墓誌)를, 판서(判書) 김수근(金洙根)이 시장(諡狀)을 찬(撰)하였다. 묘는 장천면(長川面) 묵어동(黙語洞) 후록(後麓) 정향(丁向).
배(配)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의성김씨는 부사(府使) 복일(復一)의 여(女)---(이하생략)
인재 최현은 1588년(선조 21)에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구국책을 올려 원릉참봉(元陵參奉)이 되었고, 1606년 증광별시(增廣別試) 생원과에 장운,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광해군 때 천도론이 거론되자 반대하여 그 계획을 중단시키기도 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는데, 1627년(인조 5) 이인거(李仁居)의 모반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왕명으로 석방되었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선산지역이 폐허가 되어 많은 역사적 유물이 전란으로 없어지므로 이를 걱정하여 심혈을 기울여 지리 및 역사, 인물,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영역에 걸쳐 소상하게 나타낸 『일선지(一善志)』를 지었고,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면서 학문을 좋아하고 후학을 가르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충청도 일원의 민심을 알기 위하여 명을 받고 돌아보고는 세금이 공평하지 못하고 백성의 부담이 많아 살기 어려운 것을 임금께 아뢰어 이를 시정하기도 하였다.
인조 2년에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어 사태가 심상치 않은지라 급히 입궐하라는 명을 받고 어전에 나아가니, 왕이 “경은 지략이 뛰어나서 군무에 종사한 적이 있으니 독전어사로 출전하라. 그리고 이 칼을 줄 터이니 부원수 이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처벌하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어명을 받고 북으로 가서 전세를 살펴보니 이괄이 평안도의 장정을 이끌고 당당한 기세로 계속 남진하고 있었으며 아군은 남으로 후퇴하고 있는지라, 이 이상 더 후퇴하면 조정과 민심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동요될 것이며 임진강을 저항 없이 건너게 하면 사기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 판단하고 싸움을 지휘하여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후에 이 전란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전투 보고서와 지방 관원과 군관들의 거취와 전투행위 등을 기록한 행적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인조는 전후 논공행상을 이에 의존하였다.
64세 때 8월에 강원도 관찰사 순찰사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여 많은 민폐를 시정하고 선정을 베풀었으며 북방의 호족이 평산까지 쳐들어 왔을 때, 최현은 직접 관군을 이끌고 북한강까지 가서 지켜냈는데, 정예 군사를 뽑아 동해안으로 보내 해변을 지키게 한 후 창의격문(倡義檄文)을 작성하여 각처에 발송함으로써 영서지방 각처에서 큰 반응을 일으켜 의병이 조직되었다. 1637년(인조 15) 12월에 청병이 대거 침입해 오니 왕이 남한산성으로 어가를 옮기어 적과 대치할 때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이 되어 조령산성까지 진격하였으나 강화의 소식을 듣고 치욕을 개탄하는 상주문을 올리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