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A02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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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재호 |
마을의 동제는 마을의 주산(主山)에서 지내는데 주민들은 마을제사를 흔히 ‘주산 제사’라고 부른다. 주산에 지내는 만큼 이 때의 신격은 산신에 해당한다. 오늘날 마을제사는 보천사의 스님이 대신 지내주기 때문에 예전처럼 외부인들의 출입을 금지하거나 각종 금기 혹은 제관 선출 같은 복잡한 과정은 거치지 않는다. 그러나 사찰의 스님이 마을제사를 대행해주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을 마을 차원에서 하게 되는데, 그 금액은 30만원으로 동네 돈에서 지불한다. 동네의 공동 재산은 과거에 더 많았지만 지금은 동네 소유로 되어있는 정미소와 마을 입구의 공장에서 해마다 일천만원 정도의 수입이 나온다. 그 중에서 30만원은 보천사에 마을제사비용으로 지불하고, 매월 30만원씩 동장의 봉급으로 지불한다. 이는 다른 마을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마을 운영방식이라고 하겠으며, 이에 대한 주민들의 자부심도 크다.
마을제사를 보천사에서 지내기 시작한 지는 대략 20~30년이 되는데, 주민들은 대략 5·16 이후에서 1970년대 사이로 기억한다. 당시 마을마다마을제사를 미신으로 여겨 당집을 헐던 시절이었다. 처음 한 이태 정도 동제를 지내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그 후로 마을에 젊은이가 죽는 일이 자주 생겨 마을 제사를 없애서 그런 변고가 있는 것으로 다들 생각하여 다시 복원한 것이다. 다만 복원 방식은 주민들이 새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절에다 부탁하여 대신 지내기로 한 것이다.
그 까닭은 마을주민들의 신앙생활이 거의 전부 불교로 주로 보천사를 자주 다녔다. 그런 전통은 여전히 이어져서 웬만한 마을에는 모두 있는 교회가 해평 마을에는 아직까지 없는 상태이다. 때문에 좀더 쉽게 보천사에 마을제사를 부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천사에는 비구니가 주지로 계셔서 마을제사를 예전방식대로 정월 보름날 자시에 지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마을주민들도 한 발씩 양보하여 그 때부터 지주스님의 주관아래 정월 열나흘 날 저녁 8시쯤 마을제당에서 불교식으로 마을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지주스님의 이야기로는, 사찰에서 산신제를 지내는 방식으로 마을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마을제사에 임하는 스님 자신의 마음가짐에 변화가 생긴 과정이라고 하겠는데, 그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마을주민들이 모두 늘 자주 뵙는 신도들이여서 마을제사를 대신 지내달라는 부탁을 결국은 거절할 수 없었지만, 처음에는 사찰의 입장에서 일종의 잡신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을제사를 대신하는 것은 물론 절을 비워두고 한밤중에 산에 올라 제사를 지낸다는 사실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거절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 까닭인지는 몰라도 마을제사를 지내러 가던 도중에 큰 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다. 당시 제물을 차에 싣고 다른 비구니와 함께 가는 도중에 화물차가 정면으로 달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느낌이 이상하여 길 가로 비켜섰지만 막무가내로 달려와 부딪혔다. 그 때의 차종이 엑셀이었는데, 사고의 정도가 얼마나 컸던지 엑셀 차량을 그 길로 폐차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가해자는 음주상태여서 사고를 경찰에 신고하면 곧바로 구속될 상황이었다. 그 때 마침 사고 현장에는 지나가던 택시가 하나 있었는데, 그 택시 운전사가 내려서 사고현장을 살피고 인명 피해가 생기지는 않았으니 부디 큰 마음으로 용서해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간절히 사정하기에 결국 차만 폐차시키고 가해자는 그냥 돌려보냈다. 그 때 생각하기를 마을제사를 거절한 것 때문에 이런 사고가 생긴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로 그 전에는 그저 건성으로 올리던 소지도 더욱 정성껏 올리게 되었고, 특히 제사를 지낸 뒤에는 제물일체를 경로당의 마을어른들께 갖다 드리는데, 마을 어른들께서 그 때마다 하시는 말씀이, 마을 주산인 제당에서 스님의 목탁소리가 들릴 때마다 당신들도 할 수 있는 한 정성을 함께 드리며, 제당에 올라와 보고 싶지만 오히려 방해가 될까봐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인사말과 더불어 마을을 위해 지내준 제사에 늘 감사하며, 그래서 스님이 갖다 준 제물은 예전 방식대로 어느 집 하나 빠뜨리지 않고 손톱만한 양이라도 모두 똑같이 나누어 음복한다는 말씀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은 스님 자신도 제사일이 다가오면 저절로 몸과 마음을 더욱 경건하게 한다고 한다.
동제를 준비하는 과정을 살펴 보면, 정월 초하루에 설을 쇠고 난 다음, 동회를 열어 마을에서 깨끗한 사람으로 제를 지내는 제관과 음식을 담당하는 주판을 각 한명씩 선정한다. 일단 제관으로 선정이 되면 그날부터 각별히 몸가짐에 신경을 써야 한다. 초상집에 문상을 가도 안 되며, 부부관계를 해서도 안 되고 고기도 먹으면 안 된다. 이러한 금기는 동제를 지내고 난 후에도 3개월 동안은 계속 지켜야 한다.
열 사흗날에 제관은 집 앞과 마을 어귀에 금줄을 치고, 강가에 샘을 판 다음 샘에도 금줄을 친다. 제관이 판 샘물로 동제에 사용되는 술과 밥, 떡을 짓고, 목욕재계 할 때도 이 물을 사용한다. 주판은 해평장으로 가서 장을 본다. 동제에 사용되는 음식은 백설기, 삼채소, 삼실과, 국, 밥, 건어, 생고기(소)와 미나리이다. 이 가운데 생고기와 미나리는 빠지지 않는데, 이것을 굳이 사용하는 이유는 산신령님이 좋아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열나흘 저녁이 되면 제관과 주판은 파 놓은 샘물에 가서 목욕재계를 하고 자정이 되면 장만한 음식을 가지고 산으로 올라간다. 동제를 지내는 나무 앞에 음식을 차려 놓고 술을 올린 다음 절을 한다. 제관은 축문을 읽고 다시 절을 올린 다음 소지를 올리는데, 집집마다 대주 소지를 한 장씩 올려준다. 이때 제관소지를 가장 먼저 올리고 마을사람들 소지를 차례로 올린다.
마을의 안녕을 위해 지내는 동제는 예전에는 특히 영험하고 모시기 까다로웠다고 한다. 어느 해 제관을 맡았던 사람이 동제를 끝내고 3개월이 지나기 전에 개고기를 먹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몸이 아프기 시작하여 다시 날을 받아 동제를 지낸 적도 있다고 한다.
주산의 산신당은 소나무 네 그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나무를 해치거나 꺾으면 그 사람은 죽는다는 믿음이 있을 정도로 영험하였다고 한다. 그런 영험함 때문에 일제강점기 주변 소나무들이 모두 벌목 당하였지만 이 소나무들은 나뭇가지 하나 다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