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A02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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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재호 |
이미 고려시대에 해평 서쪽 낙동강을 따라 솔숲을 조성하고 강의 범람을 막은 것이나, 조선초기 야은 길재 등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어 영남학파의 기초가 닦여진 것 등을 참고할 때, 이곳의 벼농사는 그 역사가 전국의 어느 곳보다 빨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태진의 연구에 따르면 14~16세기에 지역의 인물배출이 집중하는 것과 제언(堤堰)을 중심으로 한 수전개발 사이의 관계를 밝혔다. 그 내용인 즉, 이중환이 『택리지(擇里志)』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조선 인재의 반이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고 할 정도로 구미·선산 지역에서 예로부터 많은 인물들이 배출된 것은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선진적 수도재배의 기술이 재지사족들의 경제적 토대를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영남사림파라는 정치적·학문적 계보와 짝을 이루는 생업문화이자 기층민들의 농경문화는 ‘꼼비기’라고 하는 세시풍속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는 다른 지역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구미·선산 문화권의 기층문화이다.
낙동강에 바로 인접하고 있는 해평큰마의 경우는 수도작(벼농사)에 있어서 조금 다른 역사적 전개과정을 보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해평큰마에는 지리적 조건상 제언이 있을 수 없었다. 산간계곡이 아닌 강변의 저지대에 속했기 때문이다. 해평들은 비옥하기는 하였지만 강의 범람을 막는 치수문제와 필요시 관개를 위한 수리문제가 논농사의 주요 관건이었다. 따라서 이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수도작의 본격적인 이행은 그만큼 더딜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으로 해평지역에는 땅콩, 무, 배추, 수박을 많이 생산하였다. 땅콩의 경우 생산규모가 한 가구에서 100석을 넘게 짓는 농가가 있었으며, 경작규모가 1만 5천 평에서 2만 평에 이르는 농가들도 있었다. 주민들은 대표적인 땅콩 농가로 장익환 씨를 꼽았는데, 그의 밭 규모가 1만 5천평에 이르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특별히 땅콩농사가 이 지역에서 많이 재배하게 된 것은 식물학적 특성 때문으로, 땅콩은 물 빠짐이 좋은 사질양토에서 잘 자랄 뿐만 아니라 침수피해를 다른 어떤 작물보다도 잘 극복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제보에 의하면 적어도 3일 정도 침수가 되더라도 땅콩은 죽지 않고 생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땅콩 밭의 흙이 물에 떠내려가거나 파지지 않는 한 땅콩은 낙동강의 범람에도 그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전략 작물에 속하였다고 한다.
땅콩의 경작은 주로 낙동강 강가의 하천부지인 사질충적토에서 주로 많이 재배하였으나 요즘은 정부가 철새 보호지역으로 지정하는 바람에 넓고도 비옥한 하천부지를 마을주민들이 경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정부가 새 먹이는 주어도 사람이 먹을 것은 제공하지 않고, 사람은 죽어도 방송에 나오지 않으나 새가 죽으면 세상이 난리가 난다고 하면서 환경론자들과 정부정책을 강하게 불평하며, 요즘은 사람 세상이 아니라 ‘새(鳥) 세상’이 되었다고 비꼬기까지 한다. 특히 철새가 많이 도래하는 겨울철은 농사를 짓지 못하더라도 철새가 거의 없는 여름철에는 농토로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좋겠다는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주민들도 있다.
해평들에 논농사를 짓기 시작한 역사는 대략 일제강점기부터이다. 갑술년(1934년)에 일본인 오노도가 100마력 규모의 양수시설을 낙동강에 설치하고 수로를 만들어 논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들판의 토양이 사질이라 전체적으로 물을 공급할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여 수로 안쪽으로만 벼를 심었다.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들판의 2/3는 여전히 백모래사장이었다. 이런 들판은 땅콩이나 서숙, 메밀 등을 경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국가시책으로 대대적인 경지정리작업과 객토사업을 하고 양수시설을 증설함으로써 벼를 심을 수 있는 면적이 차츰 넓어졌다. 오늘날 양수능력은 두 개의 양수장에서 1,300마력을 양수할 수 있으며, 해평들은 물론이고 산동면 적림동과 도리사 근처까지 낙동강의 강물을 관개하는 데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