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A02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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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재호 |
마을이 낙동강변의 저지대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동네 어디서고 샘을 파면 물은 쉽게 솟지만 물에 염분이 많아서 콩죽을 끓이면 얽혀서 먹지 못했다. 물론 머리를 감거나 빨래를 하기에도 적절하지 못했다. 대신 밥은 상관없었다. 그래서 죽을 끓일 때는 상촌(上村, 혹은 웃마) 걸(거랑)물을 길어다 사용하였다. 상촌의 걸물은 흘러내리는 물이라 염분이 없기 때문이다. 걸물이 흐르는 곳에 주로 깨진 독을 묻어서 우물을 만든 후에 물을 퍼올렸다. 일종의 독우물인 셈이다. 독 안에는 잡티가 흘러들지 않고, 다른 곳보다는 깊어서 바가지로 물을 푸기가 한층 용이하였다. 빨래는 주로 강가에 나가 하였다. 강물은 염분이 없어 때가 잘 빠지고 물이 풍족해 씻기가 아주 편리하였다. 더불어 강변의 드넓은 모래바닥은 빨래를 말리기에도 더없이 좋았다.
낙동강 물길은 지금의 주민들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변화하였다.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선산읍 원동의 경우 현재는 낙동강 지류인 감천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나 예전에는 감천의 물길이 원동 남쪽을 흘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물길이 바뀌어 지금은 원동 북쪽으로 감천이 흘러 낙동강과 합수한다. 따라서 오늘날 지리적 관점으로 볼 때 원동은 행정구역상 인접한 고아읍에 속해야 할 것으로 보이지만, 물길이 바뀌기 전에 나누어진 행정구역이기 때문에 비록 강 남쪽에 위치하지만 여전히 선산읍에 속해 있다.
이와 흡사하게 해평면의 경우도 낙동강의 범람으로 지형지물들의 위치가 많이 변경되었다.
특히 낙동강을 따라 10여리에 걸쳐 조성되었던 ‘해평수(海平藪)’가 오늘날 뒷개들의 솔숲 모습으로 청소년 야영장 근처에 조금 남아 있는 실정인데, 이는 바로 강물에 의해 땅이 파헤쳐지고 나무들이 물에 쓸러 내려갔기 때문으로 주민들은 인식한다.
지금 마을의 연세 70대 노인들에게서 ‘어릴 적에 낙동강 복판에 방구(바위)가 있고 그 위에 묘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다. 원래는 산 위에 있었을 묘이지만 강물에 산이 깎여 나가고 주변의 흙들은 모두 강물에 떠내려 가버려 물의 침식작용에도 견딜 수 있는 바위만 남게 되어 결국 강 한가운데에 바위와 묘가 남는 형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묘 아래에 바위가 없었다면 그 묘도 이미 강물에 떠내려가 없어졌을 것이다. 다행히 바위 덕분에 떠내려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어떤 풍수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정말 기막힌 묘 터를 잡았다고 평하기도 한다. 이와 유사한 경우가 낙동강에 접하고 있는 조명산에서도 전해진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