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A01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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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재호 |
오늘날 구미 청소년 야영장이 위치한 뒷개들의 맨 위쪽에는 고려시대에 조성하여 수해의 근심을 막았다고 하는 소나무 숲 ‘해평장림’이 있다. 마을주민들은 ‘뒷개솔숲’이라고도 부르는데, 뒷개들에 있는 소나무 숲이라는 뜻이다.
『선산부읍지(善山府邑誌)』 임수조(林藪條)에는 ‘해평수(海平藪)’라고 소개되어 있으며, 고려시대 정승 윤석(尹碩)이 솔씨를 뿌려 숲을 만들어서 수해의 근심을 막았다고 전한다.
이러한 장림들은 낙동강을 끼고 발달한 인근 촌락에서 대개 그 흔적이나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어 ‘강가 문화’가 지닌 특징으로 이해된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조성했다고 전하는 선산읍 감천(甘川) 주변의 ‘동지수(冬至藪)’, 인동의 낙동강가에 조성된 ‘양정수(羊亭藪)’, ‘양수(陽藪 혹은 黃陽藪라고도 함)’ 등은 모두 해평장림과 같은 기능을 하는 인공림이다. 이러한 숲들은 농업사 혹은 촌락사적으로 많은 의미들을 지니고 있는 역사적 유산에 속한다.
이들 인공림들은 여름 장마철에는 강물의 범람을 막아주어 농사의 피해를 줄여주었으며, 더운 여름날에는 강물과 모래사장, 그리고 솔숲이 서로 어울려 주민들로 하여금 더위를 피할 수 있는 편안한 휴식처를 제공한다. 겨울철에는 강줄기를 따라 세차게 불어 닥치는 바람을 막는 방풍림(防風林)이 되기도 하였다. 주민들의 제보에 따르면, 낙동강이 범람할 때는 뒷개 길까지 강물이 불어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하며, 겨울철에는 낙동강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서 특히 강 건너 고아읍 쪽에서 불어오는 북서풍이 매우 세차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겨울철 북서계절풍을 숲이 막아줌으로써 마을을 좀더 안전하고 안락한 곳으로 만들어 준 것이 바로 해평장림이었던 것이라 하겠다.
마을의 안정과 안녕을 위해 필요한 숲인 만큼 전통적으로 이들에 대한 관리도 매우 엄격하였다. 해평장림은 보천에서부터 용수암(龍首巖, 용머리 바위)까지 이어져, 그 길이가 10리에 이르러 그 풍광이 강줄기를 따라 푸른 띠를 두른 것과 같았다고 하는데, 윤석(尹碩)의 후손인 윤근수(尹根壽)와 외손 임열상(任悅相)이 이어서 감사가 됨에 벌목을 금하는 법을 제안하였고 현의 사람들이 입약(立約)을 준수하였다고 한다. 이는 일종의 금송계(禁松契)였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제 금송계의 흔적을 주민들을 통해서 확인하기는 어렵다.
주민들이 알고 있는 뒷개솔숲에 대한 관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소유였다가 해방 이후에는 안해근이라는 사람이 맡아서 관리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지금 그는 대구에 거주한다고 한다. 숲의 정기를 받아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등의 사실을 감안하면 ‘뒷개솔숲’에 대한 주민들의 각별한 관리가 있었을 것이라 충분히 짐작되지만, 오랜 세월 속에서 강둑 사업이나 벌목사업 등이 이뤄지면서 소유관리에 대한 문제가 주민들의 손을 떠나게 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주민들의 제보에 따르면, ‘뒷개솔숲’의 소나무 종자는 인근 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종류가 아니라 바닷가에 많이 자라는 해송(海松)으로 색이 한층 검고, 잎이 보다 무성한 종자라고 한다. 잎이 무성하기 때문에 방풍림이나 방수림으로서의 기능에 적합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솔숲은 주민들이 기억하기로도 낙산리부터 시작하여 월곡, 산양, 금호를 거쳐 해평 마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