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28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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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冶隱先生傳 |
영어의미역 | Biography of Gil Ja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영호 |
성격 | 전(傳)|전기|인물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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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조식(曺植, 1501~1572) |
창작연도/발표연도 | 조선 전기 |
[정의]
조선 전기 조식이 구미 출신의 길재의 충절과 학문을 사모하여 지은 전기.
[개설]
조식(曺植, 1501~1572)은 조선 전기의 학자로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이다.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야은선생전」은 『남명선생문집(南冥先生文集)』에 실려 있는 전(傳)으로 조식이 야은 길재의 충절과 학문을 기리며 지었다. 길재(吉再, 1353~1419)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 조선 건국 때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절개를 지킨 인물이다. 경상북도 구미시 일대에는 길재의 충절을 기린 많은 문학 작품들이 전해 오고 있다.
[구성]
전반에서는 야은 길재의 출생과 사승 관계 및 충절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다음으로 불교를 멀리하고 유학에 심취하여 학문하는 길재의 자세와 스승에 대한 극진한 예를 부각시켰다. 이하는 결락되었다.
[내용]
길재의 자는 재보(再父)로 선산의 해평 사람이다. 나이 18세에 상산(상주)에 거주하던 사록 박분(朴賁)에게 나아가서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배웠다. 또 부친인 원진(元璡)을 따라 송도에 가서 이색(李穡, 1328~1396)·정몽주(鄭夢周, 1337~1392)·권근(權近, 1352~1409)의 문하에 유학하면서 비로소 성리학에 대해서 들었다. 부모를 섬김에 지극히 효도했고, 또 서모 노씨를 잘 섬겼으며, 부자 아내를 거느렸으나 검소하고 부지런하였다.
길재는 과거에 올라 문하성주서가 되었고, 홍무 23년 경오(1390)에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봉계에 물러나 살았다. 그 후에는 벼슬을 제수해도 부임하지 않았고 공양왕이 서거하자 마음으로 삼년상을 지냈다. 조선 태종 때 태상박사로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두 성씨를 섬기지 않는 의리를 지켰다.
길재는 상례에 엄하여서 불교의 의식을 따르지 않았다. 매양 한밤중에 자고 닭이 울면 일어나서 의관을 갖추고 사당과 앞 시대 성인들의 화상을 배알하였다. 서당으로 물러나와 책상 앞에 꿇어앉아서 학문을 강습하되 종일토록 게으름을 잊고 지냈다. 양촌이 별세하자 삼 년을 심상하였고, 박분이 죽자 또 그와 같이 하였다. 배우는 자들이 야은선생이라 일컬었고, 원근의 학도가 사방에서 모여들었는데 중들도 느껴 깨달아서 환속한 자가 수십 명이었다. (이하 결락)
[의의와 평가]
「야은선생전」은 야은 길재의 충절과 학문 및 불교에 대한 유학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고려조 충신인 야은 길재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였고, 특히 사승 관계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 그리고 불교를 멀리한 내용을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