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28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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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烏山遊錄 |
영어의미역 | Travel Literature of Geumosan Mountain |
이칭/별칭 | 「금오몽유록」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성격 | 기행문|유람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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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장복추(張福樞, 1815~1900) |
창작연도/발표연도 | 1852년(철종 3) |
[정의]
1852년(철종 3) 장복추가 구미 지역의 금오산을 유람한 후 지은 유람기.
[개설]
장복추(張福樞, 1815~1900)는 조선 후기의 예학자이자 당시 최고의 학단을 이끈 교육자이다. 자는 경하(景遐), 호는 사미헌(四未軒)이다. 장복추는 경상북도 예천 지역에서 출생하였지만 본관이 인동으로 경상북도 구미 지역과 관련이 깊은 인물이다. 「금오산유록」은 장복추가 1852년 8월 탑동(塔洞)에 있는 선조 산소를 참배한 후 신경현(申景賢), 박사진(朴士震), 이원중(李元仲) 등 8명과 함께 금오산을 유람하여 기록한 글이다.
[구성]
「금오산유록」은 서두에 산을 오르게 된 계기와 등산한 날짜 및 동행자를 자세히 기록한 후, 본문에 금오산 등정 과정과 지나는 길마다 드러나는 풍경에 대한 느낌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내용]
장복추가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의 탑동에 일이 있어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목성에 이르러 신경현, 박사진, 이원중 등의 제안으로 숭산촌에서 점심 식사를 한 후 금오산에 처음 오른다고 밝히고 있다. 금오산의 둘레와 금오산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읍들과 산 아래의 넓은 들에서 생산되는 식량이 많음을 기술하였다.
1박 2일의 등산 과정에서 금오산이 묘향산이나 풍악산에 비하면 낮은 언덕에 불과하지만 남쪽 지방에서는 결코 낮은 산이 아니며, 현인군자가 은둔하여야 유명한 산이 된다며 허유(許由)가 기산(箕山)에 은거하고 자릉(子陵)이 부춘(富春)에 은거한 사실을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장복추의 선조 문강공(文康公)이 금오산으로 피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금오산은 사계절 내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며, 야은굴(冶隱窟)과 약사암(藥師庵)이 금강산의 보덕암(普德庵)보다 아름답고, 또 채미정에 이르러 백이·숙제와 비교되는 야은 길재의 충절을 극찬하면서 자신이 초파리처럼 미천한 존재임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글의 말미에는 장복추가 일찍이 금오산에 오르기를 원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의의와 평가]
「금오산유록」은 유람기이면서 산수기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지역과 이동의 경과를 기재하였고, 자연의 묘사 가운데 느낌과 정취적 담화를 표현하였다. 비교 및 비유, 반어, 고사 인용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다양한 필치로 극대화하여 가을 금오산의 풍경과 경물에 대한 전반적인 서술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