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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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鎭璞 |
영어음역 | Hwang Jinbak |
이칭/별칭 | 국서(國瑞),월정(月庭)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산동면 성수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용만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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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구미시 산동면 성수리 |
성별 | 남 |
생년 | 1888년 4월 17일 |
몰년 | 1942년 2월 27일 |
본관 | 평해 |
[정의]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평해. 자는 국서(國瑞), 호는 월정(月庭). 1888년 4월 17일 경상북도 구미시 산동면 성수리에서 황봉수(黃鳳秀)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활동사항]
황진박은 1910년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자 책장을 박차고 일어나 약장사로 변장하여 뜻있는 동지를 찾아 각처를 두루 다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서울로 가서 구국 투쟁을 벌였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장진홍·김기용·박관영·이내성·장용희 등과 손잡고서, 지금과 같은 구국 운동 방법으로 한계가 있으니 다 같이 결사대원이 되어 직접 행동으로 옮기자고 맹세하였다.
먼저 대구의 주요 기관이던 도청·경찰부·조선은행 대구지점·식산은행 대구지점 등을 폭파하기로 뜻을 모아 김기용의 주선으로 화약을 구해 폭탄을 만든 다음 1927년 10월 27일 장진홍으로 하여금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던지게 하였다. 이후 잠적하여 장진홍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조선 노동자를 상대로 숙소를 차려놓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투쟁과 구국 사상을 불어넣으며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이후 다시 동지를 모아 투쟁을 준비하던 중에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이 있은 지 2년 만에 밀고를 당해 장진홍과 함께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대구복심법원에서 폭발물 단속 및 살인 예비죄로 1년 6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를 때 같이 옥고를 치르던 장진홍이 갑자기 사망하였다. 이에 황진박은 감옥 안의 여러 동지와 연락하여 옥문을 부수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진홍의 죽음을 밝히려다가 건조물 파괴죄로 8개월의 옥고를 더 치르게 되었다.
대구형무소에서 3년의 옥고를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가서 옛 동지와 구국단을 만들어 앞으로 큰일을 꾀하려던 것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 경찰에 붙잡혀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수차례 예비검속을 받으며 고군분투했으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2년 2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1968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