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4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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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乃成 |
영어음역 | Yi Naeseong |
이칭/별칭 | 이만우(李晩雨)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 543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용만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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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 543 |
성별 | 남 |
생년 | 1892년 |
몰년 | 1927년 |
본관 | 경주 |
대표경력 | 광복회회원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이내성은 경주이씨(慶州李氏)로서 이만우(李晩雨)로도 불렸다. 1892년 4월 l일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 543번지에서 이성률(李成律)의 5남으로 태어났다.
[활동사항]
이만우는 17세 때 계성학교를 중퇴하고 동향 동지인 장진홍(張鎭弘)과 함께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았고 제대 후 광복회(光復會)에 가입하여 독립 투쟁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매부 이영식(李永植) 목사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필사 또는 등사하여 배포하는 한편, 태극기를 만들어 3월 12일 인동(仁同) 장날을 이용하여 오후 8시 진평동 주민 200여 명을 집결시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선도하였다. 다음 장날인 3월 17일 다시 같은 곳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19년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l년 6개월의 형을 받아 옥고를 치른 뒤 출옥하였다.
이후 장진홍과 함께 왜관 지역의 공공기관을 파괴하기로 결심하고 폭탄을 제조하였다. 1927년 5월 28일 11시경 꿀로 가장한 상자 4개를 조선은행지점장, 식산은행지점장, 경찰서장, 도지사 등에게 전달하도록 박노선(朴魯宣)에게 의뢰하였는데 조선은행지점장에게만 전해지고 나머지 3개는 운반 도중 실수로 노상에 떨어져 연쇄 폭발을 일으켜 일본 경찰 4명, 은행원 1명, 통행인 1명이 중상을 입고 유리창 70여 장이 파괴되었다. 이후에도 요인 폭살과 시설 파괴를 기도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수색이 심해지자 추격을 피하여 은신하던 중 1927년 8월 구미에서 자결 순국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구미시 시미동에 묘비와 함께 있다.
[상훈과 추모]
1982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