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4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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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光璧 |
영어음역 | Choe Gwangbyeok |
이칭/별칭 | 공헌(公獻),이우정(二友亭),운엄(雲广)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용만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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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
성별 | 남 |
생년 | 1728년 |
몰년 | 1791년 |
본관 | 전주 |
대표관직 | 병조참판 |
[정의]
조선 후기 구미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 자는 공헌(公獻), 호는 이우정(二友亭) 또는 운엄(雲广). 부제학·강원감사를 역임한 인재 최현(崔晛)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최체건(崔體乾), 할아버지는 최두추(崔斗樞), 아버지는 증호조참판 최수인(崔壽仁)이다.
[활동사항]
1754년(영조 30)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759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지냈다. 1762년(영조 38) 자신이 직접 학문을 가르친 사도세자가 궤 속에 갇혀 굶어 죽는 참극을 당하자 깊은 충격을 받고 관직에서 떠났다. 1766년(영조 42) 다시 사헌부지평을 제수받고 벼슬길에 나와 사간원정언을 거쳐 1769년 장령(掌令)으로 승진한 뒤 다음해 만경현감으로 나갔다.
1782년(정조 6) 돈녕부도정에 발탁되었다. 1784년 공조참의(工曹參議)를 거쳐 1785년에 풍천부사를 지내고, 1789년 가선대부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官)·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1791년(정조 15)에 승정원부승지(承政院副承旨)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선조의 산소가 있는 경상남도 고성에 가 있다 그 해에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상훈과 추모]
장례는 유림장(儒林葬)으로 하였으며, 왕이 예조좌랑(禮曹佐郞)을 파견하여 치제(致祭)케 하고 제문(祭文)에 출재(出宰) 업적을 칭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