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3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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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韺 |
영어음역 | Jeong Yeong |
이칭/별칭 | 화숙(和叔)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포상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용만 |
성격 | 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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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포상리 |
성별 | 남 |
생년 | 1610년 |
몰년 | 1679년 |
본관 | 해주 |
대표관직 | 경상병사 |
[정의]
조선 후기 구미 출신의 무신.
[개설]
정영은 1610년(광해군 2)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포상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자질과 기백이 남달라 누구도 그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신장이 8척에 도량이 넓고 활달하며 그 음성이 우렁차 집안에서 하인에게 명하는 소리가 몇 리 밖까지 들렸다고 한다.
[가계]
본관은 해주. 자는 화숙(和叔). 신당 정붕(鄭鵬)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병조판서(兵曹判書) 정사중(鄭思中)이다.
[활동사항]
정영은 정붕의 도학을 이어 문관으로 등제되었으나, 임진왜란 후 국방의 중차대함을 절감하고 1635년(인조 13)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사헌부감찰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에서 격전을 거듭하며 적의 머리를 무수히 베었으나 정영도 큰 부상을 입었다. 인조는 깜짝 놀라 즉시 입고 있던 용포를 찢어 상처를 감싸 주었다고 한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전공을 인정받아 여러 고을 부사를 거쳐 호남좌우수사에 올랐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에 깊은 뜻을 두고 군비에 힘을 쓰다 죽으니 크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라의 운이니 어찌 하리오? 나의 충정을 어떻게 하겠는가’하고 낙향하였다. 얼마 후 경상병사로 제수되어 임지로 떠날 때 부탁받은 서찰을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나에게는 나라에 대한 충성이 있을 뿐 사사로운 일은 없다’고 하였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오자 오위도총부총관(五衛都摠府摠官)으로 다시 불렀으나 병을 빙자하여 끝까지 나아가지 않고 지내다, 1679년(숙종 5) 7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이에 왕이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케 하였다.
[학문과 사상]
신당 정붕의 도학을 이어 학문과 경륜이 뛰어났으며 평생 권세 있는 사람에게 아첨하지 않았다. 김자점이 권세를 잡고 있을 때 다들 문전성시하였으나 그는 홀로 그 문전에 가지 않았다. 우연히 노상에서 김자점을 만났으나 거짓으로 말에서 떨어지니 김자점은 눈치채지 못하고 약과 의원을 보내 문병하였으나 굳게 사양하고, 병이 나은 후에도 인사를 가지 않았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