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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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克均 |
영어음역 | Yi Geukgyun |
이칭/별칭 | 방형(邦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용만 |
[정의]
조선 전기 구미 지역에 유배된 문신.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방형(邦衡). 이집(李集)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지직(李之直), 아버지는 우의정 이인손(李仁孫), 어머니는 노신(盧信)의 딸이다. 이극균의 형제 이극배(李克培), 이극감(李克堪), 이극증(李克增), 이극돈(李克墩)은 모두 세종 및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극배와 이극균은 정승이 되었고 4형제가 공신에 올라 세칭 오극가(五克家)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으며, 이들이 살았던 옛 러시아 대사관 부근을 오극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활동사항]
이극균은 1456년(세조 1) 식년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무술에도 뛰어나 세조의 총애를 받고 선전관이 되었다. 1460년 회령도사를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이 되고 이어 도체찰사의 종사관이 되었다. 다음 해 김구(金龜), 최항(崔恒),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교정손자주해(校正孫子註解)』를 편찬했다. 1472년(성종 3) 동지중추부사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明)에 다녀왔다.
1467년(세조 13) 부호군으로 만포절제사(滿浦節制使) 재직 중 건주위(建州衛) 여진을 정벌한 군공으로 3등 공신이 되어 노비 6구를 하사받았다. 1491년 이조판서로서 서북면도원수가 되어 야인 토벌에 공을 세웠다. 좌참찬을 거쳐 1497년(연산군 3) 판중추부사로 있을 때 경상우도의 지도를 만들어 바쳤으며 1499년 좌찬성과 평안도경변사를 지냈다. 1500년에는 우의정이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좌의정 성준(成俊)과 함께 『서북제번기(西北諸蕃記)』와 『서북지도(西北地圖)』를 편찬하였다. 1502년에는 영의정 및 좌의정과 함께 시폐(時弊) 10조를 상소하였다. 1503년에는 좌의정이 되었다. 누차 연산군의 방탕을 바로 잡으려고 애쓴 것이 화근이 되어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인동(仁同)으로 유배당하였다가 곧 사사되었으나 뒤에 신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