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포 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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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자룡리에 있었던 조선 시대 통신 시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경우, 봉수대는 고창현[현 고창읍]과 흥덕현[현 흥덕면]에는 없었고, 무장현[현 무장면]에만 두 곳이 설치되었다. 그 이유는 무장현이 바닷가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무장현 봉수조를 보면 “고리포봉수재현서이십리남응영광군홍농산북응소응포(古里浦烽燧在縣西二十里南應靈光郡弘農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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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자룡리에 있는 해수욕장. 구시포 해안의 지세는 유명한 장사산(長沙山)의 맥락을 이어받아 좌우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는 듯 펑퍼짐하게 펼쳐져 있으며, 완만한 해변은 안전도가 놓아 천연의 피서지로 적격이다. 구시포해수욕장은 1992년 7월에 개장했다. 길이 약 1.7㎞, 폭 2m의 백사장과 우거진 송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장실, 샤워장, 개수대 등의 편의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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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 분포하는 불과 연기를 이용한 통신 수단과 시설. 봉수제도는 변방의 다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군사적 목적으로만 사용하였다. 봉수대는 수십 리마다 눈에 잘 띄는 산꼭대기에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 모든 봉수에는 봉수대가 5개 있었는데 이는 거수를 5구분하였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는 횃불 1개, 적이 나타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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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자룡리 구시포해수욕장 남쪽에 있는 동굴. 비둘기굴은 원래 비둘기들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1597년 임진왜란 때 인근 주민 수십 명이 숨어 살았다고 한다. 비둘기굴이 있는 구시포해수욕장은 백사장이 단단해서 물이 빠지면 차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이다. 해수욕장 뒤에는 송림이 울창하고 모래가 곱고 좋아서 해수욕을 즐기기에 최적이다. 또한 서해 가막도 위로 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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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전라북도 고창군의 역사. 고창이라는 지명은 『삼국사기(三國史記)』권36, 잡지 제5 무량군편에서 “백제의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을 신라 경덕왕 때 고창현(高敞縣)으로 고쳐 불렀다.”는 기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현재의 고창군은 신라 때에 고창현으로 무령군이 관할하였고, 고려 시대에는 고부군에 속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고창현이 되었고, 조선 후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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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의 인구, 산업, 교통 등의 인문지리 요소. 고창 지역 사람들이 고창의 자연환경을 이용하여 만들어 놓은 고창 지역만의 독특한 인문지리적 결과다. 고창 지역에서는 중기 구석기인 5만 2000년부터 고수천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심원면의 대죽도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 편이 출토되었고,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인 고인돌은 전 세계 최고의 밀집도와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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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에 속하는 법정리. 뚜렷한 명칭유래는 확인되지 않는다. ‘자여포(自予浦)’라 부르다가 1592년 이후에 자룡으로 불렸다.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자룡리’이라 바꿔 불렀다고 한다. 한편, 산에 나무가 없고 헐벗은 붉은 산이라 ‘자룡(紫龍)’이라는 의견도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남양방씨(南陽房氏)가 터를 잡아 살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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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하장리·검산리·송곡리와 공음면 두암리에 걸쳐 있는 산. 고려 말의 지명인 장사현[현재 무장면]에서 따온 이름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문헌비고(文獻備考)』에 “고장사재금치북이십리유석성기(古長沙在今治北二十里有石城基)”라고 쓰인 기록으로 보아 장사산 정상에 산성 터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정상의 넓은 터에는 고려 말에 축성한 장사산성의 성터였음을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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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에서 개항기까지의 전라북도 고창 지역의 역사. 현재의 고창은 고창현과 무장현(茂長縣), 흥덕현(興德縣)이 통합되어 성립되었다. 고창현은 고려 시대에 상질감무가 겸무하였다. 조선 초기인 1401년(태종 1)에 비로소 고창현에 감무를 두었으며, 1455년(세조 1) 지방 방위 조직의 개편에 따라 나주진관(羅州鎭管)의 속읍이 되면서 현감을 파견했고, 속오군(束伍軍)은 입암산성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