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707
한자 申肅
영어공식명칭 Sin Suk
이칭/별칭 신연길,신태련,강재,시정,치정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가평군 군내면 향교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조성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5년 12월 29일연표보기 - 신숙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일 - 신숙 3·1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3년 1월 - 신숙 국민대표회의 부의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30년 - 신숙 한국독립당 총무위원장, 문화부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33년 - 신숙 한국독립군 참모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신숙 재만동지회 위원장 역임
추모 시기/일시 1963년 - 신숙 독립훈장 독립장 서훈
몰년 시기/일시 1967년 11월 22일연표보기 - 신숙 사망
출생지 신숙 출생지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읍내리 향교리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정치인
성별
대표 경력 한국독립군 참모장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가평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가계]

신숙(申肅)[1885~1967]의 본관은 평산(平山), 아명은 연길(連吉), 호는 강재(剛齋)·시정(是丁)·치정(癡丁)이다. 21세 때 이름을 ‘태련(泰鍊)’으로 바꾸었으며, 1920년 4월 해외로 망명하면서 이름을 ‘숙’으로 바꾸었다.

아버지는 의병 활동을 했던 신석범(申錫範)이며, 1885년 12월 29일 경기도 가평군 군내면 향교리에서 태어났다. 1903년 4월 강원도 양구군의 의병장 최도환(崔道煥)의 차녀 최백경(崔百卿)과 혼인하였다.

[활동 사항]

신숙(申肅)은 12세부터 14세까지 이규봉(李圭鳳)에게 한학을 사사하고, 1900년에 가평군 군내면 약정대리(約正代理), 1902년에 외서면의 약정(約正)을 거쳐 가평군 서기로 근무하였다. 1903년 12월 1일 동학에 입교하였다. 1906년 순검(巡檢)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일진회의 기관지인 국민신보(國民申報)의 기자가 되었지만 친일매국적 행위에 분노하여 6개월만에 사직하였다. 이후 탁지부 인쇄국 교정원으로 4년간 근무하였다. 이 무렵 후에 이봉창(李奉昌)이 졸업한 문창학교(文昌學校)를 설립하여 교감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 10월 안중근(安重根)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저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정한교(鄭漢敎)와 함께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를 암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재명(李在明)이 이완용(李完用)을 저격한 사건으로 통감부의 경계가 강화되어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1912년 천도교종학강습소 강사, 천도교중앙총부 도사실 서계원을 거쳐 1914년에 천도교 대구대교구장, 1917년에 중앙총부 대종사 종법원 겸 의사원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김영륜(金永倫)과 같이 보성사(普成社)에서 인쇄하던 독립선언서를 교정하고 각 지방에 배포하였다. 3·1운동 직후 의친왕 이강(李剛)·김가진(金嘉鎭)·전협(全協) 등이 조직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다가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어 석방되기도 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천도교 대표의 파견을 요청하자 같은해 4월 23일 신상태(申相泰)와 함께 만주를 거쳐 상해로 이동하였다. 같은해 12월에는 ‘상해 대한거류민단 의사회의(議事會議)’에서 의원으로 당선되어 활동하였다. 1921년 4월 노령·남북만주·국내 등 8개 단체 대표들의 군사통일회의 의장에 추대되었고,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해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는 데도 조력하였다.

1925년 북만주 일대에서 교사와 농촌계몽 활동에 종사하면서 3년 동안 홍진(洪震) 등과 함께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하였다. 북경에서는 천도교 북경종리원(北京宗理院)에 체류하면서 동포를 모아 한교동지회(韓僑同志會)를 조직,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930년 7월 3일 북만주 각지에서 모여든 홍진·지청천(池靑天)·정신(鄭信) 등 40여 명이 조직한 한국독립당의 총무위원장·문화부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으로 쌍성현(雙城縣) 공략에 참전하였다. 그리고 한족자치연합회의 상무위원으로, 당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이념을 실현시켜 갔다.

1933년에는 한국독립당이 편성한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으로서 남경(南京)·상해 등지에 파견되어 국민당정부와 군사적으로 긴밀한 협력을 강구하였다. 1935년 동삼성으로 오던 중 영구(營口)에서 일본 경찰에 잡혔으나 이듬해 3월 보석으로 풀려났다. 1945년 하얼빈[哈爾濱]에서 한하인(韓荷仁)·한형권(韓馨權)·오광선(吳光鮮) 등과 재만동지회를 결성,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광복군 본영과 연합작전을 계획하다가 8월 15일 해방을 맞이했다.

1945년 8월 26일 조직된 지린 한국인회의 위원장에 선임되어 교민들의 귀국을 위해 노력했다. 1946년 12월 귀국한 뒤 1947년 4월 16일 입법의회 의원에 피임되었고,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목적으로 김구·김규식(金圭植) 등과 함께 평양에 다녀왔다. 1949년 1월에는 천도교 도사에 선임되었으며 만화회(萬化會)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피난지 부산에서 천도교보국연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어 월남교인 수습과 각 지방에 지부를 조직하는 등 천도교의 핵심적 인물로 활동하였다.

1956년 11월 15일 이동화(李東華)·장건상(張建相)·최익환(崔益煥)·고정훈(高政勳)·김성숙(金星淑) 등과 함께 민주혁신당을 조직하고 중앙위원과 중앙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58년 3월 천도교 이념에 입각한 정당으로 동학당을 결성하기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자 대표책임위원으로 추대되어 정당활동을 추진하였다. 1959년에는 민권수호국민총연맹 대표지도위원, 광복동지회 부회장으로 자유당 독재정권과 투쟁하였다. 1960년 4·19혁명 직후에는 국민각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으며, 과도내각이 들어서면서 실시된 7·29총선에서 철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저술 및 작품]

신숙의 자서전으로 1959년에 출판된 『나의 일생』이 있다.

[상훈과 추모]

신숙은 1963년 독립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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