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3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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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母山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나각순 |
조성|건립 시기/일시 | 통일 신라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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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9년 - 시굴조사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2년 6월 3일 - 서울특별시 기념물 지정 상정 계획 발표 |
현 소재지 | 대모산성 -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산68-28 |
성격 | 산성 |
양식 | 퇴뫼식 산성 |
둘레 | 남벽 길이 258m, 동벽 5m, 북벽 299m, 서벽 5m로 전체 둘레 567m[또는 583m] |
면적 | 내부 면적은 대략 6,334㎡ |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 산성.
[개설]
대모산성은 대모산 정상의 두 봉우리를 에둘러 축조한 테뫼식 산성이다. 표고 293m의 대모산은 한남정맥을 따라 솟아있는 용인 석장산, 수원 광교산, 의왕 청계산, 성남 인릉산에 이어져 서초구 내곡동고개를 통하여 그 산줄기를 잇고 있으며, 탄천과 양재천이 합류되는 곳에서 한강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솟아오른 산봉우리이다. 따라서 한강 일대를 전망하기에 매우 좋은 곳이다. 북쪽으로 한강에 가까운 삼성동토성, 동북쪽으로 몽촌토성과 풍납리토성, 한강 너머 아차산성과 삼각산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대모산은 구룡산과 더불어 두 봉우리가 낙타의 쌍봉처럼 봉긋하게 솟아 있으며, 양재천과 한강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형성되어 있고, 내곡동 쪽으로 뻗은 부(副)능선에 의해 세 방향의 단조로운 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들 두 산의 계곡에서 흐르는 물줄기는 양재천과 탄천으로 흘러들어 한강으로 합류된다.
대모산성에 대한 기록은 조선총독부에서 1942년 발행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헌인릉의 주산인 대모산 정상부에 소형의 토루지(土壘址)가 있다”고 한 것이 처음이다. 이후 1999년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의해서 시굴조사가 있었다. 서울특별시에서 ‘서울종합방재센터 119시스템 무선통신망기지국(TRS) 장비설치사업’과 관련하여 대모산 정상부에 기지국을 설치하게 되면서 이곳에 대해 한정된 시굴조사를 하게 된 것이다. 이때 일부 구간에서 석축 성벽이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통일 신라 시대 토기가 출토되어 축조시기를 짐작하게 하였다.
여기서 성벽과 직접 관련이 없는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가 출토되는 주거지 1기가 조사되었다. 한반도 중부 이남에서 점토대토기가 출토되는 주거지는 보령 교성리나 대전 보문산유적과 같이 해발 고도가 높은 지역에 있는 것이 특징으로 일종의 고지취락 형태를 취하고 있다. 대모산 경우도 고지에 자리하여 주변에 대한 조망이 탁월한 조건으로 일종의 고지 취락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어 2002·2003년에 걸친 서울특별시의 성곽조사가 실시되어 1999년에 시굴 조사한 내용을 재확인하였다. 전체적으로 성벽의 붕괴가 심하고 흙이 두텁게 덮여 있어 체성이 노출된 곳은 거의 없고, 시굴조사 지점에 석축 성벽만 남아 있다.
성벽의 전체 모습은 붕괴가 심하여 확인할 수 없으나, 시굴조사보고서에서 남벽 길이 258m, 동벽 5m, 북벽 299m, 서벽 5m로 전체 둘레 567m[또는 583m]로 추정하였다. 성의 진입로나 문지에 대한 조사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는데, 대체로 현재의 등산로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았다.
성곽 형태는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으로 축성방식은 편축식(片築式)이었다. 성벽은 산 정상부를 돌아가면서 ‘ㄴ’자 형태로 흙을 깎아내고 외부에 돌로 쌓았다. 급히 쌓은 듯 엉성함을 보이며 성벽은 40~100㎝ 할석을 사용하였는데, 3단 정도 남아 있는 상태이다. 성 내부 면적은 약 1,900평 정도로 추정되는데, 동서로 길고 중간 중간에 작은 평탄지가 있다. 특히 남벽 안쪽에 약 200평 정도의 평탄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헌릉·인릉 등 시설지의 철조망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어 접근이 어려운 실정이다. 이 지점에 건물지나 저수시설 등이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보았다.
시굴조사에서 점토대토기 외에 투창이 있는 투창(透窓)이 있는 단각고배류(短脚高杯類)·대부완(臺附盌)과 연질·경질의 각종 호(壺)와 개배류(蓋杯類)를 비롯하여 고려시대 것으로 분류될 수 있는 토기편까지 여러 종류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서울특별시의 지표조사에서도 시기를 알 수 없는 토기편이 약간 수습되었다.
이러한 유물들은 인근의 이성산성·호암산성·아차산성 등 삼국·통일 신라 시대 성곽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유사한 양상을 보여준다. 한편 기와는 1점도 채집되지 않았는데, 성 내부에 기와를 올릴 정도의 건물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러한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토기를 통해 볼 때 대모산성은 일단 통일 신라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극히 제한된 시굴조사와 지표조사 만으로 이 성곽의 역사적 성격을 단정할 수는 없다. 특히 백제 도읍지와 가까이 있다는 역사지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성백제 시기의 성곽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백제 유물이 1점도 발견되지 않는 상황에서 축조시기에 대한 단정적인 결정은 어려운 형편이다. 성곽의 축조 시기와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필요하다.
[건립 경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대당전쟁의 수행하기 위해 축조한 주장성[남한산성]이나 호암산성 등 서울 인근의 산성과 같은 성격으로 보인다.
[위치]
양재천과 탄천이 만나는 지점의 남쪽에 있는 한남정맥의 끝 봉우리인 대모산 정상에 위치한다.
[형태]
대모산 8~9부 능선을 따라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으로, 축성방식은 편축식(片築式)이다. 성벽은 산 정상부를 돌아가면서 ‘ㄴ’자 형태로 흙을 깎아내고 외부에 돌로 쌓았다. 총 둘레는 583m, 내부 면적은 대략 6,334㎡이다. 평면형태는 동서방향을 중심축으로 하는 장타원형이다.
[현황]
대모산성은 급경사면 위에 축조되어 있고, 정상에 서울종합방재센터의 무선통신 송·수신탑이 세워져 있으며 헬기장·체육시설 등이 설치되어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대모산 정상부에 동서 방향으로 조성된 테뫼식 산성의 흔적이 있다. 산성 진입로가 되는 등산로 옆에는 성곽의 성돌을 이용하여 축조된 예비군 훈련용 참호가 남아 있어 경관을 해침과 동시에 성벽 훼손 현장을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출토유물이 인근의 이성산성·호암산성·아차산성 등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 후 축조된 성곽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유사한 양상을 나타내고 백제시대의 유물이 전혀 출토되지 않았음으로 일단 통일 신라 전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성백제의 도읍지 인근의 있어 지형적으로 백제에서도 중요시 여겼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