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2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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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淸北道天主敎發祥地甘谷玫瑰聖母巡禮地聖堂 |
영어의미역 | Gamgok Catholic Church, the birthplace of Christianity in Chungbuk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 357-3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정기범 |
[개설]
감곡성당은 1896년 프랑스 임가밀로 신부에 의해 충청북도에서는 첫번째, 국내에서는 18번째로 세워진 성당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문맹 퇴치를 위해 매괴학교를 설립하여 우리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준 성당이기도 하다. 또한 감곡성당은 100여 년간의 한국 천주교와 감곡성당의 발자취가 담겨있는 각종 유물들이 전시하고 있어 한국 천주교사 뿐만 아니라 우리 근대사에 많은 영향을 준 역사적인 장소이다.
천주교에서는 신부, 수녀, 수도자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성당으로, 과연 성모의 기적이 감곡성당에 머물고 있는 듯하다. 산 중턱에 자리한 감곡성당은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릴 뿐만 아니라 건축학적으로도 아름다운 건물로 평가되어 충청북도에서는 서양식 건물로는 처음으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2006년에는 한국 천주교 사상 2번째로 성모순례지 성지로 정식 선포되었다.
[간절한 기도로 부지를 확보하다]
감곡성당이 위치한 감곡면 왕장리는 지금의 행정구역상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과 인접해 있다. 과거에는 장호원 지역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감곡성당의 처음 이름은 장호원성당이었다. 장호원 지역은 본래 부엉골본당 관할 지역이었다. 부엉골은 지금의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에 있었던 산간 마을로 1885년 예수성심신학교가 설립되면서 교우촌으로 조성되었다.
1887년 예수성심신학교가 서울 용산으로 옮겨가게 되는데 그 뒤에도 본당은 남아 있었다. 1894년 봄, 부엉골본당 신부로 부임한 임가밀로[Bouillon, 부이용[任加彌]]는 부엉골의 본당이 북쪽 끝에 위치해 있고 산지 마을이라 적당치 않다고 판단, 새 부지를 물색하고 있었다. 사목 방문차 여주를 지나 장호원에 이르렀을 때, 매산(玫山) 언덕에 자리 잡고 있던 한옥 집을 보고 본당 사목지로서 적합하다는 것을 직감했다고 한다.
그 즉시 임가밀로 신부는 “성모님! 만일 저 대궐 같은 집과 산을 저의 소유로 주신다면 저는 당신의 비천한 종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주보가 매괴 성모님이 되실 것입니다.”라고 기도하였고, 부엉골로 돌아가서도 매괴 성모님께 끊임없이 청원하였다고 한다.
임가밀로 신부가 본당 사목지로 점찍었던 그 대궐 같은 집은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육촌 오빠인 민응식(閔應植)의 집이었고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명성황후가 피난 왔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충주목사였던 민응식은 장호원 집(현 매괴고등학교)을 명성황후 피난처로 제공한 덕분에 출세의 길이 열렸고 기존의 집은 109칸으로 크게 개수되었다.
1895년 10월 12일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처참하게 시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반일 감정을 더욱 자극하였고 전국에서는 의병이 일어났다. 당시 장호원에는 전화선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일본군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의병들은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한 후 아무도 살지 않고 있던 민응식 집을 의병들의 본부로 삼았다.
일본군은 참패한 일본군 수비대의 보복을 위해 이곳을 습격하였고, 민응식의 집과 인근 마을에 불을 질러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이후 1896년 5월 성모성월에 임가밀로 신부는 민응식 소유의 대지와 산, 불타버린 폐허를 싼 값에 구입하게 되었다. 결국 역사 속의 우연일지라도 임가밀로 신부가 처음에 기도한 대로 감곡본당을 그 위에 지을 수 있었고 성모님께 봉헌하여 이곳이 ‘감곡매괴성모성당’이 된 것이다. 천주교에서 5월은 성모님의 달이다. 우리 역사에서는 비극이었지만 임가밀로 신부가 성모님께 청원하였고, 그 기도의 선물로 성모님의 달인 5월에 감곡성당은 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충청북도 천주교의 산파가 되다]
임가밀로 신부는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허락을 얻어 민응식의 집을 매입하고, 불탄 집을 수리하였다. 그러나 예정된 일의 진척이 늦어지자 1896년 9월 17일 예정보다 앞서 부엉골본당에서 장호원본당(지금의 감곡본당)으로 이전하였다. 이로써 부엉골본당은 폐지되었다.
당시 장호원에는 신자 수가 5~6명에 불과하였지만, 본당의 관할 지역은 매우 넓었다. 경기도 여주·이천, 충청도 단양·제천·충주·음성·괴산·진천·청주·보은 등이 속하였다. 공소 수는 27개에 이르렀으며, 총 신자 수는 1,3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감곡에 정착하게 된 임가밀로 신부는 먼저 사제관과 그에 딸린 소성당 공사를 계속하여 그 해 12월 5일 완공하였다.
그러나 장호원과 27개 공소의 신자들이 증가하면서 성당 건립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이에 따라 임가밀로 신부는 1903년 성당 신축을 시작하여 다음해 9월 완공하고, 10월 2일에는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신축 성당의 규모는 한옥과 양옥의 절충식으로 총 80평에 달했다.
본당이 안정되어가던 1930년에는 종각 높이가 130척이 넘는 고딕 양식의 성당을 10월 7일에 신축하였으며, 1933년에는 본당의 『성가집(聖歌集)』을 편찬·간행하였다. 이렇듯 임가밀로 신부와 신자들의 열성으로 본당의 교세도 크게 증가하여 1937년에는 총 신자 수가 2,150명에 이르게 되었다.
일제 말기가 되면서 장호원본당도 다른 본당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의 감시와 간섭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942년에는 보좌 조인환(曺仁煥)[베드로] 신부가 사소한 일로 투옥되는 일이 있었다. 1943년 일제가 매산 언덕에 신사(神社)를 건립하려 하자, 임가밀로 신부는 신사를 지으려고 터를 닦던 곳에 「무염시태 기적의 패」를 묻어두고 “이 공사를 중단하게 해주시면 이곳을 성모님께 봉헌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였다고 한다. 결국 묘하게도 공사 중 여러 가지 기상이변으로 인해 공사를 진행하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결국 일본은 이곳에 신사를 짓지 못하고 패망하였다.
1943년 임가밀로 신부가 프랑스 선교사라는 이유로 용산신학교에 연금을 당하자 장금구(莊金龜)(크리소스토모) 신부가 제2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였고, 다음해에는 유영근(劉榮根)(요한) 신부가 부임하여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때 신자들은 한일합병 당시 임가밀로 신부가 제대 밑에 숨겨 두었던 태극기를 게양하고 임가밀로 신부를 맞이하여 광복의 기쁨을 누렸다.
임가밀로 신부는 이해 11월 제4대 주임으로 다시 부임하여 활동하다가 1947년 10월 선종하였고, 그 뒤를 이어 보좌로 활동하던 박고안(朴稿安)(프란치스코) 신부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지금은 김웅렬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가 주임을 맡고 있다.
이처럼 감곡성당은 충청북도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성당으로 도내의 많은 성당의 산파 역할을 하였다. 1920년에는 증평본당의 전신인 고마리본당, 1932년에는 수동본당의 전신인 청주본당, 1945년에는 충주본당, 1957년에는 지금의 금왕본당인 무극본당 등이 설립되었다. 또한 지금의 음성 지역에 있는 본당이 탄생하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조선의 민족의식을 고취한 임가밀로 신부]
설립자 임가밀로 신부는 1869년 성모발현지 루르드에서 20㎞ 떨어진 프랑스 남서부 타르브교구 비에유 아듸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루르드를 자주 방문하여 자신을 루르드의 성모님께 봉헌하며 성장하였으며 신부가 된 후에는 까르멜 수도원에서 4살 아래인 소화 데레사(성녀 품에 오름)와도 만나 친교를 쌓았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되었다.
임가밀로 신부는 프랑스 외방 전교회 소속의 신부로서, 1893년에 서품을 받고 바로 입국하여 1894년에 여주 부엉골에 부임하였다. 1896년 감곡성당을 건립하고 제1대 신부가 된 이래 1947년까지 51년간 감곡성당에서 사목을 하였다. 임가밀로 신부는 본당에 있는 동안 지역 사회의 복음화에 앞장섰으며,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였던 임가밀로 신부는 한불조약 이후 조선에 입국, 고종으로부터 직접 태극기를 하사받았다. 이 태극기가 그 유명한 감곡성당 소장본 태극기로, 안타깝게도 현재는 사진만 남아있을 뿐 원본 태극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 태극기는 1886년 조선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청의 간섭을 신랄하게 비난했던 데니(Deny, Owen N)가 소장했던 태극기와 동일한 형태이다.
태극 음방과 양방의 몸체가 가늘고 길게 그려져 있으며 1874년 청나라에서 발간된 「통상조약장정성안휘편」이라는 책 표지에 그려진 태극 문양인 통상약장태극문양과 비슷하지만 음방과 양방의 위치가 다르다. 임가밀로 신부는 이 태극기를 제대 밑에 숨겨두고 있었으며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이 태극기를 꺼냈고, 감곡본당 신자들은 이 태극기를 본떠 태극기를 그려 만세를 불렀다. 감곡본당 소장 태극기는 1950년 즈음에 충북도청에서 빌려간 후 행방을 알 수 없다.
임가밀로 신부의 조선인 민족의식 고취 노력은 교육 사업을 통해서도 나타났다. 감곡성당은 본당이 자리를 잡아가던 1907년에는 감곡면 왕장리에 청주교구의 메리놀 소속 신부들이 주축이 되어 감곡 천주교 내에 카미리우스 신부를 설립자로 하여 남학교인 매괴학당을 설립하였다. 이때의 학생은 5명이었으며, 매괴학교로 개칭되었다.
1916년 사립학교 요람에 의하면 학교명은 공교매괴(公敎玫瑰)였으며, 설립자 겸 교장은 임가밀로 신부였다. 학생 수는 35명이었다. 1912년에는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여학교는 그 해 본당에 부임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들 학교는 이듬해 6년제 보통학교로 과정이 변경되었다. 임가밀로 신부는 1922년에 학교 건물을 1차 개축하였다가, 1936년 정식 인가를 받고 3층 교사로 증축하였다.
임가밀로 신부는 1947년 "성모여, 저를 구하소서"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임종하였다. 당시 경향잡지에서 임가밀로 신부의 임종을 이렇게 애도하였다. “장호원으로 부임하여 50여 년을 하루같이 봉직한 장호원본당의 창설자요 은인이니 동 지방 교유들은 신부의 은공을 길이 기억할 것이다.”
성당 뒤 양지 바른 곳에 묘소가 있었는데, 현재는 성당 내에 묘지를 만들어 안장되었다. 임가밀로 신부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자주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했다고 한다. 감곡성당으로 올라오는 길에 이 어구가 크게 새겨져 있다.
[100여 년간 신앙의 발자취, 매괴박물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감곡성당은 다양한 역사적 유물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러한 유물들을 전시하여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매괴박물관은 3층으로 되어 있는데 1934년 건립된 옛 사제관을 개축, 2002년 10월 개관한 것이다. 매괴박물관에는 1914년 국내 첫 성체 거동 때부터 사용했던 성광과 금색 제의, 영대, 구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이 지은 「주교요지(主敎要旨)」 1906년판 등 문서류와, 본당사를 개괄한 각종 사진 50여 점은 100여 년간 신앙의 발자취를 그대로 담고 있다.
항온·항습 시설이 완벽한 수장고에는 250여 점의 유물이 있다.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제구와 서적, 심지어는 은행놀이판과 카드 등 각종 유물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유물 번호까지 매겨져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돼 있다. 또한 매괴박물관에서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은 3층 다락방 성체조배실이다. 국내에서 첫 성체 거동을 거행한 성당의 성체조배실이다.
1층 전시실에는 1936년 제작된 동종이 전시되어 있다. 감곡성당이 1930년에 완공된 후 임가밀로 신부는 프랑스 루르드의 제조회사에 동종 3개를 주문하였다. 마리아 종(대), 벨라뎃다 종(중), 데레사 종(소) 세 개의 종은 각각 도(마리아), 레(데레사), 미(벨라뎃다) 음을 내어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었다.
일제강점기 말엽에 쇠붙이 공출로 종들도 수난을 당했는데 다행히 해방 후 3개의 종이 모두 성당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마리아 종과 데레사 종은 손상을 입어 제 음을 내지 못해 현재 마리아 종은 지금 박물관 1층, 데레사 종은 박물관 2층에 보관되어 있다. 벨라뎃다 종은 성당 종탑에 매달려 있다. 그 밖에 2층과 3층 전시실에 전시실에는 성광, 성모성심기, 깝바(Cope: 1914년 래 특별한 종교의식 때 주교나 사제가 입는 소매 없는 외투 형식의 긴옷), 예수성심기, 촛대, 십자고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연이은 기적, 성모순례지로 지정되다]
감곡성당은 설립 당시부터 기적이라고 생각될 만한 일들이 많았다. 민응식의 집을 싼 값에 살 수 있게 된 것이 그렇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감곡성당 터를 신사로 이용하려 하였을 때 공사 중 여러 기상 이변 등으로 공사가 진행되지 못했던 것도 그렇다.
또 전해지는 일화로는 6·25전쟁 때 감곡성당이 인민군의 임시 요새로 사용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인민군은 성당 위에 모셔진 성모상을 총을 쏴서 깨어버리려 하였으나 총알이 무려 7발이나 성모상을 관통하였는데도 성모상이 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망치로 성모상을 깨어 버리려 하자 성모상이 눈물을 흘려 그 인민군이 성모상을 훼손할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감곡에서 장호원으로 이르는 다리를 끊기 위해 비행기 폭격이 엄청나게 많았지만 이 역시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이를 성모님의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감곡성당은 2006년 10월 7일 수원교구의 남양 성모 순례지 성지에 이어 한국천주교 사상 2번째로 성모 순례지 성지로 정식 선포되었다.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는 2006년 10월 7일 감곡본당 주보인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을 맞아 교서를 발표, 교회법 제1230조와 제1232조에 따라 올해로 본당 설정 110주년을 맞은 감곡성당을 매괴 성모 순례지로 승인했다. 성모순례지 지정은 1991년 10월 1일 성모께 봉헌된 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에 이어 한국 천주교사에서 두 번째이다.
장봉훈 주교는 ‘매괴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는 제목의 교서를 통해 “지난 110년간 감곡매괴성모성당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전능이 성모님을 통해 끊임없이 드러난 은총의 자리가 되어 왔다”며 “지난 7월 26일 본당 설정 110주년을 앞두고 감곡성당을 ‘성모 순례지’로 승인해줄 것을 공식 청원해 옴에 따라 매괴 성모 순례지로 승인하는 바이다”고 밝혔다.
장봉훈 주교는 성모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은총의 표징들로, 성당 옆 매괴성모광장이 일제강점기 중 신사참배 터로 지정되어 공사를 계획했으나 천둥과 소나기, 벼락으로 일제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 1950년 6·25전쟁 중에는 공산당원들이 성당 제대 중앙에 모셔진 매괴 성모상에 총을 쏘았으나 7군데 탄흔이 남는 가운데서도 파괴되지 않아 지금까지 성모칠고를 묵상케 하고 있는 것 등을 들었다. 천주교 청주교구는 2006년 10월 19일 감곡성당 매괴성모광장에서 장봉훈 주교 집전으로 성모 순례지 선포식과 성체거동 및 성체강복 등을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