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08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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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浣 |
영어음역 | Yi Wan |
이칭/별칭 | 징지(澄之),매죽헌(梅竹軒),정익공(貞翼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종대 |
성격 | 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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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
성별 | 남 |
생년 | 1602년 |
몰년 | 1674년 |
본관 | 경주 |
대표관직 | 우의정 |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경주. 자는 징지(澄之), 호는 매죽헌(梅竹軒). 계림부원군 이수일(李守一)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정자촌에서 출생하였다. 19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하고 1627년 영유현령, 1629년 상원군수, 1630년 숙천부사, 1631년 평안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김자점 휘하의 별장으로 출전, 정방산성 싸움에서 전공을 세우고, 1638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39년 동부승지를 거쳐, 부장(副將)으로 심양에 가서 임경업을 도왔다. 양주목사를 거쳐, 1643년 경기수사겸삼도통어사, 1646년 공청병사를 지냈다. 효종이 즉위하자 송시열과 북벌계획을 수립하고, 어영대장, 포도대장을 거쳐 1653년 특지로 병조참판에 발탁되었다. 1654년 훈련대장이 되어 신무기를 제조하고 성곽 보수, 신축 등을 하며 전쟁 준비를 했다.
1654년 한성부판윤, 1655년 공조판서, 1656년 형조판서, 훈련대장, 지중추부사를 맡으며 북벌 기회를 엿보았으나 효종의 별세로 북벌계획이 중지되었다. 현종이 즉위하자 1663년 형조판서, 1664년 공조판서, 훈련대장에 재임하면서 병조판서에 올랐으나 사양하고 은퇴하였다.
1666년 판의금, 병조판서에 제수되자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다. 판윤, 포도대장, 훈련대장를 거쳐, 1669년 병조판서에 다시 제수되자 신병을 이유로 여러 번 사직상소를 올리자 다시 형조판서에 제수했다가 강화부유수로 삼았다. 판윤을 거쳐 1671년 또다시 병조판서에 제수하였으나 병권을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수어사에 등용되어, 1673년 포도대장을 거쳐 1674년 4월 26일 우의정에 올랐으나 네 번이나 사직소를 올렸다가 6월 14일에 별세하였다.
[학문과 사상]
이완은 매우 엄격하고 교만한 성품이 있기는 하나 관직에 있으면서 법을 지키고 청탁을 받지 않았다. 이완은 인조 때부터 군사를 잘 다룬다고 이름이 났었다. 효종 초기에 구인후를 대신해 훈국의 대장이 되었는데 사나운 병사들이 굴복하여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였다. 여러 차례 한성부윤과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모두에게 직책을 잘 수행한다고 칭찬을 받았다.
[저술 및 작품]
1640년 등주 싸움에서 쓴 6조 문서가 있어 『금주위사목(錦州衛事目)』이라 하여 강화사고에 보관되어 있다.
[묘소]
묘소가 경기도 여주시 여주읍 상거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