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07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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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生 |
영어음역 | Gim Saeng |
이칭/별칭 | 지단(知端),구(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박상일 |
[정의]
통일신라시대 음성 지역에서 활동했다고 전하는 서예가.
[가계]
자는 지단(知端), 별명은 구(玖). 『삼국사기』권 48 열전 김생조에 부모가 두드러지지 않아 가계를 알 수 없다고 적혀 있다.
[활동사항]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원통산 아래에서 오로지 글씨에만 정진하였다는 전설과 함께 “낙엽에 먹물로 글씨를 썼는데 그 낙엽이 계곡으로 모여 계곡물이 검어졌다”는 얘기가 전한다.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는데, 80살이 넘도록 글씨에 몰두하여 예서·행서·초서가 모두 입신(入神)의 경지였다 한다. 김생의 행적은 알 수 없으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충주목 불우조(佛宇條) 김생사(金生寺) 부분에 “김생이 불도를 닦으며 이곳에 머물렀기에 김생사라 이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숙종 때 송나라에 사신으로 간 홍관(洪灌)이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에게 김생의 행서와 초서 한 폭을 내보이자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라고 하며 놀라워 하였다고 한다.
김생의 글씨로 전해지는 작품들이 모두 사찰 또는 불교와 관련된 점으로 보아 부처를 좋아해 장가를 들지 않았다(好佛不娶)는 말로 김생의 생을 짐작할 뿐이다. 김생은 특히 고려시대 문인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는데,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는 신품제일(神品第一)로 평하였다.
[저술 및 작품]
김생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는 필적으로 현재 경복궁에 있는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가 있다.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의 비문 글씨는 954년(광종 5)에 승려 단목(端目)이 김생의 행서를 집자(集字)한 것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유행한 왕희지·구양순 류의 단정하고 미려한 글씨와는 달리 활동적인 붓놀림으로 개성을 잘 표출시키고 있다.
김생의 유일한 서첩으로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가 있으며, 『해동명적(海東名蹟)』·『대동서법(大東書法)』에도 몇 점이 실려 있다. 특히 「여산폭포시(廬山瀑布詩)」는 자유 분방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필적이다. 이밖에 「백률사석당기(栢栗寺石幢記)」·「화엄사화엄경석각(華嚴寺華嚴經石刻)」·「창림사비(昌林寺碑)」가 있다.
그러나 「창림사비」는 물론 탁본조차 전하지 않는다. 단지 원나라의 조맹부(趙孟頫)가 「동서당집고첩발(東書堂集古帖跋)」에서 “「창림사비」는 신라 김생의 글씨로 자획에 전형(典型)이 깊어 당인(唐人)의 명각(名刻)이라도 이를 능가하지 못한다”는 품평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