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730 |
---|---|
한자 | 韓景職 |
분야 |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조현범 |
출생 시기/일시 | 1902년 12월 29일 - 한경직 출생 |
---|---|
수학 시기/일시 | 1922년 - 한경직 숭실전문학교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25년 - 한경직 숭실전문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 한경직 귀국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 한경직 목사 안수 |
활동 시기/일시 | 1958년 9월 - 한경직 숭실대학교 학장 재임 |
활동 시기/일시 | 1967년 - 한경직 숭실대학교 이사장 재임 |
활동 시기/일시 | 1992년 - 한경직 템플턴상 수상 |
몰년 시기/일시 | 2000년 - 한경직 사망 |
출생지 | 한경직 출생지 - 평안남도 평원군 |
학교|수학지 | 숭실대학교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로 369 |
활동지 | 숭실대학교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로 369 |
성격 | 목사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이사장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숭실대학교 이사장을 지낸 목사.
[개설]
한경직(韓景職)[1902~2000]은 1992년에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는 평가를 받는 템플턴상을 수상하였다. 2000년에 98세로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한경직은 1902년 12월 29일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났다. 1912년 평양에서 조선총독부의 정식 인가를 받아 개신교 계통의 사립 학교인 숭실전문학교가 세워졌다.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25년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1926년부터 1929년까지 4년간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폐결핵 진단을 받고 뉴멕시코주의 요양원에서 치료한 후 1932년에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신의주에 있는 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다가 1933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해방 후에 월남하여 서울에 영락교회를 세웠다. 그후 장로교 교단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한편, 숭실전문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1938년에 폐교되었다. 6·25전쟁 이후 서울에서는 한경직 등 숭실전문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학교 재건을 위한 노력이 벌어졌다. 그 결과 1954년 4월 설립 인가를 받아 숭실대학교가 세워졌는데, 영락교회의 부속건물을 임시교사로 사용하였다. 한경직은 남한에서 새로 설립된 숭실대학교의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숭실대학교는 임시교사로 사용하던 영락교회 부속건물이 낡고 협소하여 새로운 교사를 물색하였다. 그리하여 1957년 6월 현재의 동작구 상도동 캠퍼스로 이전하였다. 한경직은 1958년 9월까지 학장으로 재임하였고, 1967년부터 1970년까지 3년 동안은 숭실대학교의 이사장으로 재임하였다. 한경직은 숭실대학교의 발전을 위하여 많은 공헌을 하였다. 한경직의 공헌을 기리기 위하여 현재 숭실대학교 구내에는 한경직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사상과 저술]
한경직은 기독교 사상에 입각하여 철저한 반공의식을 가졌으며 민족복음화를 지상 과제로 여겼다. 한경직의 저술로는 『건국과 기독교』[1956], 『민주국가의 정신적 기초』[1968], 『한경직 목사 설교 전집』[1987] 등 다수가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소재한 영락동산 7단지 제일 위에 위치해 있다.
[상훈과 추모]
한경직은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으며, 1998년에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