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5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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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誠源 |
이칭/별칭 | 태초(太初),낭간(琅玕),충경(忠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차인배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 문신.
[개설]
유성원(柳誠源)[?~1456]은 1차 단종복위운동[1456년]에 가담했다가 순절한 사육신 중 한 명이다.
[가계]
유성원의 증조는 유수(柳濡)이며, 조부는 유호(柳滸)이다. 아버지는 사인 유사근(柳士根)이며, 어머니는 윤임(尹臨)의 딸이다.
[활동 사항]
1456년(세조 2) 단종복위사건 당시 유성원은 성삼문과 박팽년 등을 국문하는 과정에서 연류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자신의 집에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현재 동작구 노량진동에는 사육신의 무덤이 사육신공원으로 조성 관리되고 있다. 언제 어떤 연유로 노량진에 무덤이 조영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노량진이 사육신의 거열형 집행 후 효시 장소라는 설이 있으며, 태학사 조관빈(趙觀彬)[1691~1757]이 비명을 찬술하여 1782년(정조 6)에 건립한 사육신 신도비에 무명의 스님 혹은 김시습(金時習)이 육신의 시신을 일부 수습하여 노량진 언덕에 묻었다고 하는 설이 실려 있다.
[학문과 저술]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집현전에 들어가 『의방유취(醫方類聚)』 편찬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1447년 중시문과 을과 급제 이후에는 춘추관 사관(史官) 자격으로 세종의 명에 따라 정인지(鄭麟趾), 박팽년, 신숙주와 함께 『고려사(高麗史)』 개정 편찬과정에 참여하였다.
[묘소]
숙종대 사육신이 신원되면서 1681년(숙종 7) 사육신의 묘소로 알려진 노량진 언덕에 사육신 배향 사당이 건립되었다. 1691년(숙종 17) 12월에는 ‘민절사(愍節祠)’로 사액되었다가, 이듬해 1월 ‘민절서원(愍節書院)’으로 고쳤고 신도비가 세워졌다. 민절사는 현재의 사육신역사공원 내에 위치하였으나 터만 남아있다. 사육신역사공원에는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6인 외에도 김문기(金文起)의 가묘가 추가되었으며, 원래 성삼문의 부친인 성승(成勝)의 무덤이 있었다고 전한다.
[상훈과 추모]
노량진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 노운서원(魯雲書院), 영월 창절사(彰節祠), 연산((連山)[현 충청남도 논산시] 충곡서원(忠谷書院), 대구 낙빈서원(洛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