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4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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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昌嬪 安氏 神道碑 |
영어공식명칭 | Changbin Anssi's Memorial Stone |
이칭/별칭 | 창빈안씨신도비부묘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엄기석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499년(연산군 5) - 창빈 안씨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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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549년(명종 4) - 창빈 안씨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683년 - 창빈 안씨 신도비 건립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3년 11월 11일 - 창빈 안씨 신도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4호 지정 |
현 소재지 | 창빈 안씨 묘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산41-2] 국립현충원 |
성격 | 비석 |
관련 인물 | 창빈안씨|중종|영양군|덕흥대원군|선조 |
크기(높이,너비,두께) | 전체 높이 312㎝|비신 높이 204㎝|비신 폭 63.5㎝|옥개석 크기 70㎝ |
문화재 지정 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4호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의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조선 11대 국왕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묘역에 세워진 신도비.
[개설]
창빈(昌嬪) 안씨(安氏)[1499~1549]는 중종반정 공신인 안탄대(安坦大)의 딸로 1518년(중종 13) 중종의 후궁이 되었다. 중종과 사이에서 장남 영양군(永陽君), 차남 이이수(李頤壽), 덕흥군(德興君)[1530~1559] 등 3남을 낳고 1녀로 정신옹주를 낳았다. 이 중 셋째 덕흥군은 명종을 계승하여 왕위에 오른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 즉 선조(宣祖)의 생부(生父)였다. 1567년 왕위에 오른 선조는 이미 세상을 떠난 생부인 덕흥군을 ‘덕흥대원군’으로 추존하였고, 1577년(선조 10)에는 창빈 안씨를 정1품 ‘창빈(昌嬪)’으로 추봉하였다. 결과적으로 선조 이후 조선의 국왕은 모두 창빈 안씨의 직계 후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544년(중종 39) 창빈 안씨는 중종이 승하하자 인수궁으로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문정왕후의 만류로 궁에 더 머물렀다가, 이후 1549년(명종 4) 사저에 머물던 중에 51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리에 무덤이 있었으나 이듬해인 1551년(명종 6) 덕흥군이 현재 위치인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당시 경기도 과천현 동작리]으로 이장하였다.
[건립 경위]
창빈 안씨 신도비는 1683년(숙종 9)에 세워졌다. 비문은 신정(申晸)[1628~1687]이 짓고, 글씨는 이정영(李正英)[1616~1686]이 썼다.
[위치]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산41-2] 국립현충원 안에 있는 창빈 안씨 묘역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
비신(碑身)은 화강암으로 조성되었다. 총 높이는 312㎝, 비신의 높이만 204㎝, 비신 폭 63.5㎝이며, 옥개석 크기는 70㎝로 상대적으로 다른 신도비에 비해 크게 조성되었다.
[금석문]
창빈 안씨 신도비의 비명에는 창빈 안씨의 가계, 궁에 들어와서 중종의 승은을 입어 후궁에 오르게 된 경위 등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말미에는 덕흥대원군의 가계에 대한 내용도 있다. 창빈 안씨에 대한 기록은 숙종 때 영의정이었던 남구만(南九萬)[1629~1711]의 문집인 『약천집(藥泉集)』에 수록된 「창빈묘지명(昌嬪墓誌銘)」에도 그 내용이 전하고 있다.
[현황]
창빈 안씨 신도비는 창빈 안씨 묘역과 함께 ‘창빈안씨신도비부묘소(昌嬪安氏神道碑附墓所)’라는 명칭으로 1983년 11월 11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후궁의 원묘(園墓) 가운데 신도비를 갖춘 보기 드문 사례의 문화재로 창빈 안씨와 덕흥대원군의 생애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