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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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혜영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가마니촌의 형성 과정과 테레사 수녀의 방문.
[사당동 가마니촌의 형성과 테레사수녀의 방문 ]
6·25전쟁 이후 한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주거문제로 꼽혔던 판자촌은 일제 강점기 형성된 토막촌이 그 기원이다. 농촌의 소작농들이 식민지 농업정책으로 인해 농사 지을 땅을 잃고 서울로 대거 이주해 산중턱이나 둑 등에 움막을 지은 것이 바로 토막촌이었다. 토막촌은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귀환한 해외동포, 월남민 및 도시 이재민들에 의해 판자촌으로 확장되었다. 이들은 국공유 임야, 고지대, 하천, 도로변, 관리가 허술한 개인 소유 임야에 무허가 건축물을 건립하고 집단 거주했다. 이렇게 형성된 판자촌은 경제 개발과 그에 따른 이농이 본격화되면서 1960~70년대 대표적인 도시 빈민의 주거 형태로 자리 잡았다.
대도시 변두리의 산비탈이나 산등성이에 조성되어 산동네로 불리기도 한 판자촌은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형성된 집단적 빈민촌이었다. 1961년 전체 주택의 20%가 판자촌이었다. 1964년 서울시는 서울에 있는 판자집이 최소 5만 2,543가구라고 추정했고, 1970년에는 항공 측량을 통해 무허가 건물 수를 총 18만 7,554채로 확정했다. 1987년에도 서울 변두리의 무허가 주택은 15만여 동에 달했다.
도심 곳곳에 들어선 판자촌의 무허가 주택들은 목판이나 베니어판, 아연 철판, 천막 등을 활용해 지어져 화재나 수해 등 재난에 취약했다. 규모도 4, 5평 정도의 소규모로 부엌 달린 방 하나가 고작이었다. 때문에 서울시에서는 1960년대 후반 판자촌 정비작업의 일환으로 「무허가건물 연차별 정리계획[1965~1970]」, 「불량건물 정리계획[1967~1969]」 등을 마련했다. 도심지에 마구잡이로 형성된 판자촌을 철거하고 시 외곽의 유휴 국공유지에 대단위 정착지를 설정해 주민들을 집단 이주시키는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1960년대 말 서울시민의 약 15%에 해당하는 인구가 강제적으로 이주를 당했다.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의 산기슭 일대가 철거민들의 대규모 집단이주 정착지로 변모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이 지역은 이미 6·25전쟁 때부터 피난민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는데, 1968년 서울시가 도심 정비 계획을 추진하면서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과 서울특별시 중구 양동의 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철거된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했다. 근 200세대에 달하는 이들 이주민은 서울시가 무상으로 땅을 불하해 준다는 말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의 산동네로 들어왔다. 이들의 이주에 따라 시유지 7만 평, 사유지 2만 평의 대지 위에 판잣집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서울시는 이주민들에게 이주민증을 발급하고 시유지인 산을 분할해 가구당 10평씩 배분했다. 하지만 대부분 저임금 도시하층민들인 이들은 마땅한 생계수단도 없는 데다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도심과도 거리가 멀어 그 절반이 배당받은 땅을 팔고 떠났다. 그럼에도 싼 주거지를 찾는 이농민과 도시 영세민들이 계속해서 이곳으로 모여들었고,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의 판자촌은 10년 만에 약 10배 넘게 증가할 정도로 급속히 팽창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판자촌의 형성과 확장을 막으려는 정부와 주민들 사이에서는 무허가 건축물의 철거와 주민들의 저항, 재건축이 숨바꼭질 하듯 반복되었다. 가마니를 덮어놓고 어렵게 살았다고 하여 ‘가마니촌’이라 불리기도 한 이곳은 1960년대 말 형성된 서울의 판자촌 200여 곳 가운데 하나였다.
정착 초기에 주민들은 시의 도움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전기도 직접 끌어다 쓰고 물도 길어다 먹었다. 산기슭에 위치해 있어 교통 상황도 매우 열악했다. 하지만 인구가 늘고 그럴 듯한 거주지가 형성되자 선거 때마다 이 지역의 개발 또는 양성화가 선거 공약으로 등장했다. 표를 의식한 정부에서는 도로를 포장하고 초등학교를 설립하고 파출소를 설치했다. 그러면서 집단 이주지는 서서히 도시 시가지로 변모해갔다. 이곳에 자리 잡은 주민들 역시 열악한 환경에서나마 판자촌을 자신들의 삶의 공간으로 가꾸며 공동체의 삶을 일구어갔다.
그런 가운데 가마니촌 주민들에게 특별한 희망을 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빈자의 성녀”라 불리는 마더 테레사 수녀가 이곳을 방문한 것이다. 1979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테레사 수녀는 1981년 5월 3일 이문희 대구교구 주교의 초청으로 처음 한국에 왔다. 테레사 수녀는 가는 곳마다 가난한 이에 대한 관심과 가족 간의 사랑을 호소했고, 5월 5일 어린이날 오후 예고도 없이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3동 산등성이 판자촌을 찾았다. 그리고 이곳의 가난한 이웃들을 만나 위로와 희망을 전하고 어린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테레사 수녀의 2박 3일 방문 일정 중에는 서울시내 빈민가 위로 방문이 있었다. 하지만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가마니촌 방문은 미리 계획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서울시에서는 테레사 수녀가 판자촌을 둘러볼 것에 대비해 재개발 등으로 비교적 정비가 잘 되어가고 있던 서울특별시 강서구 화곡동 시범연립주택단지나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등 4곳을 선정해 놓고 천주교 교구 측 또는 테레사 수녀 방한단 일행이 안내를 요청할 경우 추천할 요량이었다. 서울 빈민촌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전 세계에 타전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서울시 당국에게는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지만, 테레사 수녀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가마니촌 방문은 주민들에게 소중한 축복이었다.
[사당동 가마니촌의 재개발과 소멸]
테레사 수녀의 방문 두 달 뒤인 1981년 7월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판자촌에는 개발 열풍이 불었다. 1980년대까지 판자촌의 무허가 건물에 대한 서울시의 대책은 시 외곽 이주, 현지 정착, 양성화, 현지 개량, 재개발 등 크게 다섯 단계로 변화해 왔다.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에 가마니촌이 형성되던 1968년까지는 주로 도심지 국공유지와 하천변의 판자촌을 시 외곽으로 이전시켰다. 서울 도심 정비와 개발을 위해 판자촌을 허물고 외곽으로 밀어낸 것이다. 또 무허가 건물이 밀집한 고지대에 시민아파트를 건립해 현지에 정착시키는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판자촌에 대규모 집단 이주가 이루어진 뒤에는 ‘양성화’ 정책과 뒤이어 현지개량 정책이 추진되었다. 무허가 건물을 추인하고 겉보기에 미관이 나쁜 건물을 새롭게 단장하게 하거나, 도로 등 공공시설을 설치한 후 국공유지를 불하해 주어 해당 주민들이 다시 집을 짓도록 한 것이다. 그러다가 1973년 5월 주민개량촉진임시조치법이 제정됨에 따라 서울시의 판자촌 대책은 무허가 건물을 재개발 형식으로 정비하는 형태로 전환되었다. 고지대의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고 개발 가능한 지역은 재개발해 현지 주민들을 모두 수용하는 정책이었다. 이에 따라 저소득층이 집단 거주하고 있는 무허가 주택 14만여 동 중 8만 채를 재개발 대상으로 선정해 200여 지구로 나누어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이 사업은 지역 여건과 주민 경제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시행되어 주민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샀다.
이렇게 되자 서울시는 1981년 들어 현지 여건과 주민 능력을 감안해 재개발 정비지역을 줄이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면 재조정했다. 또한 서울시가 실질적으로 재개발를 추진하되 대형 건설업체가 전체 공정을 담당하던 공영 개발 방식을 바꾸어 택지를 제공하는 주민[가옥주]이 재개발조합을 만들고 사업을 시행할 건설사를 선정하여 재개발 사업을 진행해 나가는 ‘합동재개발’ 방식을 택했다. 기존의 공영 개발 방식을 민영화해 건설자본이 사업의 전면에 나서는 한편, 서울시는 그 시행 주체에서 빠진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서울시는 가옥주와 세입자 등의 복잡한 이해 관계자들을 가옥주들의 재개발조합과 민간건설업체 간의 관계로 압축시키고 주민들과의 직접적인 마찰을 피할 수 있었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가마니촌도 1981년 7월 7일 재개발사업 기공식이 개최됨으로써 본격적인 ‘합동재개발’ 단계에 들어갔다. 재개발 사업 대상은 산21~24번지 일대 2만2,376평[사유지 1만7,103평 포함]으로, 우선 1차로 산21번지 일대 6,011평이 착공되었다. 약 3억2000여만 원에 달하는 사업비는 주민부담금 2억여 원과 가구당 400만 원씩의 융자금, 그리고 50만 원의 특별지원금 등으로 마련했다. 기존의 무허가 건축물을 철거하고 현대식 아파트 14동 302가구를 건립해 1982년 2월 말까지 입주하게 하는 일정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1981년 10월에는 산22번지 일대의 재개발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재개발 사업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우선 가옥주 중에는 재개발이 되고 나서 아파트에 입주할 형편이 못되어 입주권을 전매해 투기꾼의 배만 불리는 일이 허다했다. 더욱이 조합에 참여할 수 없었던 세입자들은 아무런 보상이나 대책 없이 주거 공간 자체를 순식간에 박탈당했다. 때문에 가옥주와 세입자 사이에 끊임 없는 갈등과 강제 철거에 따른 집단 저항이 발생했다.
1981년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산22번지 일대에 약 1,600여 명의 철거반원들이 들이닥쳤다. 이 과정에서 500여 가구의 판자촌이 철거되었고 1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이 지역의 철거민들은 1985년 1,052세대를 중심으로 세입자대책위원회를 구성해 2년 6개월 동안 재개발법 철폐와 생존권 보장 등 요구조건을 내세우며 기나긴 싸움을 해나갔다. 이들은 철거에 대응해 경찰서, 국회, 구청을 항의 방문하고 당시 여당인 민정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다. 또한 가두시위 등 공세적이고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해 세입자 특별분양권 보장과 특별분양권에 대한 340여만 원에 상당하는 전매보상책을 얻어냈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의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문제들이 반복되었다. 산24번지 일대에서는 세입자들의 반발로 철거 작업이 1년 이상 중단되었고, 산17번지 일대에서는 1988년 11월 조합 측이 고용한 철거용역 800여 명과 주민 600여 명이 충돌해 수십 명이 다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철거 용역들은 쇠파이프와 각목 등으로 강제 철거에 반대하는 세입자들을 무차별 구타했고 4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철거반원 또한 10여 명이 주민들에 의해 상처를 입었다. 당시 이 지역에는 3,289가구에 달하던 세입자 가구 가운데 대부분이 떠나고 790여 가구가 잔류해 있었다. 이들은 조합 측이 대책으로 제시한 7평 규모의 아파트 방 1간 분양 또는 5인 가족 기준 100여만 원의 이주대책비 제공에 반대하며 임대아파트의 입주권을 부여하거나 인근 공원 용지를 해제해 세입자를 위한 아파트를 건립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러한 생존권을 보장 받기 위한 세입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의 무허가 정착촌은 결국 강제 철거되었다. 이 지역에는 신축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판자촌 주민들은 기존의 주거지 인근 단독주택의 지하 셋방이나 옥탑방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더욱 처지가 열악한 사람들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이나 경기도 성남 등지의 새로운 판자촌으로 이주했다. 이렇게 하여 1960년대부터 도시의 저소득층이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살던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산기슭의 가마니촌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주민들은 수차례의 철거와 재정착, 해체를 되풀이하며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