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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1275
한자 龍驤鳳翥亭
영어공식명칭 Arriving at a pavilion named dragon and phoenix fly high at dawn
이칭/별칭 효차용양봉저정,새벽에 용양봉저정에 당도하다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인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752년 - 정조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800년 - 정조 사망
배경 지역 용양봉저정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로32길 14-5[본동 10-8]지도보기
성격 한시|7언 율시
작가 정조

[정의]

정조가 화성 행차 시 머물렀던 서울특별시 동작 지역의 노량나루 남쪽의 정자인 용양봉저정에서 지은 한시.

[개설]

「용양봉저정」정조(正祖)[1752~1800]가 서울특별시 동작 지역 본동 인근의 정자인 용양봉저정에서 지은 한시이다.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융릉을 경기도 양주에서 수원 화성으로 옮겨 모시고 ‘현륭원’이라 이름한 후, 해마다 전배(展拜)하기 위하여 화성 행차를 하였다. 이때 정조는 행차의 편의를 높이고 백성들의 노고를 줄이기 위하여 노량나루에 주교(舟橋), 곧 배다리를 설치했는데, 배다리를 건넌 후 노량나루의 남쪽에서 쉬어가는 곳이 바로 용양봉저정이었다.

[구성]

「용양봉저정」은 7언 율시로 구성된 한시로, 『홍재전서(弘齋全書)』 권7에 수록되어 있다.

「용양봉저정」은 경기도 화성에 가기 위하여 새벽에 도착한 용양봉저정에서 바라본 노량나루한강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수련에서는 노량나루를 건너간 강의 이남에 있는 정자를 ‘명루’라고 하였고, 함련에서는 정자의 이름에 들어있는 ‘용’과 ‘봉황’의 글자를 이용하여 육지처럼 이어진 배다리와 그 밑에 출렁이는 강물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였다. 경련에서는 화성 행차에 나선 행렬의 성대한 모양을 묘사한 후 미련에서는 정자에서 쉬었으니 이제 화성까지 막힘없이 달려갈 것임을 다짐하며 끝맺고 있다.

[내용]

효차용양봉저정(曉次龍驤鳳翥亭)[새벽에 용양봉저정에 당도하다]

영화관도대강남(迎華官道大江南)[큰 강 남쪽에 자리한 영화역(迎華驛) 관도에는]

상유명루경면함(上有名樓鏡面涵)[위에 명루(名樓)가 있어 강물에 환히 비치누나]

만축용양성자륙(萬舳龍驤成紫陸)[만 척의 용양선은 붉은 육지 이루었고]

십주란학양청람(十洲鸞鶴漾靑嵐)[십 주의 난학들은 푸른 기운을 출렁이네]

기함숙무증범포(旗含宿霧增帆飽)[안개 머금은 깃발엔 바람 돛을 더하였고]

홍음명하의고감(虹飮明河倚鼓酣)[은하수 마신 무지개는 북소리를 기대었네]

극망지지대근원(極望遲遲臺近遠)[멀리서 가까이서 지지대(遲遲臺)를 바라보며]

갱교전구부정참(更敎前驅不停驂)[다시 전구(前驅)로 하여금 말 못 멈추게 하노라]

[특징]

「용양봉저정」정조가 화성 행차에 보이고 있는 깊은 자부심과 애정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정조노량나루에 설치한 배다리를 건너와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행궁 역할을 하였던 정자의 이름을 직접 짓기도 하였다. ‘용양봉저(龍驤鳳翥)’는 곧 ‘용이 뛰어오르고 봉황이 날아오른다’는 뜻으로 정자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굽이치는 모습을 비유한 말로 이름을 삼은 것이다. 함련에서 특히 ‘만 척의 자주색의 육지’를 이루었다고 한 부분은 노량나루를 건너기 위하여 설치했던 배다리를 묘사한 부분으로, 붉은 자줏빛 천을 깔아 배와 배를 연결하고 다리를 만들었던 당시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의의와 평가]

「용양봉저정」정조의 전배 행렬의 성대함과 한강 양안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로서의 서울특별시 동작 지역 노량나루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왕의 원활한 화성 행차를 돕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가설되었던 배다리의 위용과 함께 강을 건너온 행렬의 휴식에 필수적인 역할을 했던 용양봉저정에서의 풍경이 잘 드러난 한시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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