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1147 |
---|---|
한자 | 三伏 |
영어공식명칭 | Sambok, three hottest days on the sixth and seventh lunar months |
이칭/별칭 | 복날[伏日],삼경일(三庚日)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모란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에서 음력 6월에서 7월 사이 초복·중복·말복의 삼복을 지내는 세시풍속.
[개설]
삼복(三伏)은 음력 6~7월, 즉 양력 7월~8월 사이에 있는 초복(初伏), 중복(中伏), 말복(末伏) 3일을 통칭하여 일컫는 세시풍속이다. 초복은 하지(夏至)로부터 세 번째 경일(庚日)이며, 중복은 하지로부터 네 번째 경일이고, 말복은 입추(立秋)로부터 첫 번째 경일이다. 24절기는 음력이 아닌 양력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복날의 날짜도 양력에 따라 정해져서 해마다 일정한 날짜는 아니다. 보통 각 복날의 차이는 10일이지만, 간혹 중복과 말복 사이가 20일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월복(越伏)이라고 부른다. 삼복은 일년 중 더위가 가장 기승을 부리는 날로, 개장국, 삼계탕 등 보양식을 만들어 먹으며 더위에 지친 몸을 보한다. 이를 복달임이라고 부른다.
[연원 및 변천]
삼복의 풍습은 조선 시대 삼대세시기라고 불리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경도잡지(京都雜志)』 등에서 고루 언급하고 있다. 이날의 시식으로는 공통적으로 개장국[구장(狗醬)]을 들고 있다. 『동국세시기』와 『경도잡지』에서는 복날 개장국을 먹는 풍습에 대해 공통적으로 『사기』를 인용하여 진나라 덕공 2년에 사당을 짓고 개를 찢어 죽여 충재(蟲災)를 예방하는 풍습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았다. 개장국 외의 복날 시절음식으로는 『동국세시기』와 『열양세시기』에서 팥죽[적소두죽(赤小豆粥)]을 들었다. 『열양세시기』에서는 개장국은 양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팥죽은 역귀를 물리치기 위해서 먹는 것이라고 하였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더위를 피해 냇가나 산으로 가서 천렵을 하거나 준비한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며 노는 것이 삼복의 대표적인 풍속이다. 『동작구지』[1994]에 따르면 복날이면 약수터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몸에 좋은 성분이 있다고 믿는 약수를 마시며 건강도 챙기고 더위를 피해 산에 위치한 약수터에서 피서도 즐겼다는 것이다. 또, 1990년대 경에는 여성들이 복날에 더운 날씨로 달궈진 모래속에서 찜질을 하는 풍습도 있었다고 한다.
이날의 대표적인 시절음식으로는 개장국, 육개장, 민어, 삼계탕 등이 있다. 육개장은 소고기[肉]로 만든 개장국이라는 뜻으로 개고기를 꺼리거나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복달임 음식이다. 전근대시기 서울 지역의 반가에서는 민어회나 민어탕, 민어전 등을 복날 시절음식으로 삼기도 했다.
동작구에서는 삼복 시절음식으로 가정에서 삼계탕, 개장국 등을 만들어 먹었다. 삼계탕의 경우 닭을 통째로 장만해 배를 가르고 그 안에 인삼, 밤, 대추, 찹쌀 등을 채워 고아서 먹었다고 한다. 개장국을 못 먹는 경우 다른 음식으로 보신을 했다고 하는데, 『동작구지』[1994]의 한 구술자는 골뱅이와 조개로 만든 보양식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복날 삼계탕, 개장국 등을 직접 만들어 먹었던 예전과 달리 최근에는 삼복이면 전문 식당을 찾아 보양식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동작구에도 상도동, 사당동 인근에 삼계탕과 개장국 등을 판매하는 식당들이 있는데, 삼복 무렵이면 다른 때보다 훨씬 많은 손님이 몰린다. 이 식당들에서는 개장국이나 보신탕이라는 용어 대신 사철탕이나 영양탕이라는 이름을 메뉴에 사용한다. 이처럼 개장국이라는 직접적인 용어 대신에 보신탕, 사철탕, 영양탕 등의 용어가 사용된 것은 1950년대 전후 부터 한국의 개 식용 문화가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게 되면서부터 일어난 현상이다. 결국 1980년대 초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특별시에서는 개고기 식용에 대한 단계적 규제를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83년 9월 21일을 기점으로 서울시내 모든 보신탕집이 문을 닫았다. 그 이후 해당 업소들은 외곽 지역으로 이전하거나 삼계탕 집 등으로 간판을 바꿔 달며 영업을 지속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