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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 말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1126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지명/시설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혜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7년 8월 - 국립서울모자원 착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8년 9월 24일연표보기 - 국립서울모자원 준공
소재지 국립서울모자원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57 지도보기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6·25전쟁 미망인과 그 자녀를 수용·보호하기 위해 설립되었던 집합주택.

[개설]

1950년대에 6·25전쟁으로 인하여 남편을 잃은 소위 ‘전재미망인(戰災未亡人)’은 전국적으로 최소 3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저학력 또는 문맹자였고 생계를 유지할 만한 기술이나 사회경험이 없어 부양해야 할 자녀와 함께 매우 빈곤하게 생활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구호가 필요한 전재미망인과 그 자녀를 수용, 보호하고 직업을 알선하기 위한 기관으로 서울과 부산에 국립모자원 각 1개소를 1953년 8월에 창설하였다.

초기에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 소재 효창아파트에 마련한 서울전재모자수용소(서울戰災母子收容所)를 국립서울모자원(國立서울母子院)으로 개칭하고, 200명 정도를 수용하였다. 당시 정부에서 마련해준 모자원은 다다미방이어서 냉기 때문에 겨울을 나기가 어려운 집이었다.

청파동의 국립서울모자원은 이후 노량진역 앞으로 이전하였다. 노량진 57번지에 국립서울모자원을 새로 증축하기로 하고 1957년 8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958년 9월 24일 낙성식을 거행했다. 운크라[UNKRA], 즉 국제연합한국재건단의 원조로 마련된 건물은 숙사(宿舍), 직업보도장, 취사장, 사무실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시설을 이용하여 60여 세대, 180명 규모의 전재미망인과 그 자녀가 안정적으로 거주하는 한편, 직업기술을 익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도록 도왔다. 당시 전재미망인과 그 자녀를 위해 건축한 주택은 단칸방이 여러 개 연결된 단체주거공간이었다. 사람들은 그 집의 모양이 ‘말의 집’[마굿간] 같다고 하여 ‘말집’이라고 불렀다. 말집은 노량진이 재개발되기 이전까지 남아있었으나 현재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모자원에서 강습한 기술로는 양재, 미용, 이발, 편물, 수예, 세탁, 사진 등이었고, 실습을 위한 세탁기, 편물기, 사진기, 재봉틀도 갖추고 있었다. 나중에는 가정부로 취업할 수 있도록 음식요리법, 가정보건, 꽃꽂이, 세탁법, 도의 등의 가정부 교양훈련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성과를 알리고자, 국립서울모자원에서는 1963년 직업훈련의 결과물인 인형, 편물 등 각종 수공품의 전시회를 일반인 대상으로 개최하기도 했다.

이후 이곳에서 기술을 배우고 독립해 나간 전재미망인이 모여 사는 곳도 생겼다. 모자원에서 나가는 사람들을 위해 국립서울모자원에서는 1959년 영등포구 노량진동 산12번지에 연립주택을 건설한 바 있다. 다만, 축대도 쌓지 않은 언덕에 3단계로 깎아 연립주택을 지었기 때문에 비가 많이 내리면 산사태의 위험이 높았다. 결국 1963년 5월의 집중호우 때 집 뒤의 10미터 높이의 언덕이 무너지는 바람에 연립주택 2동이 반파되고 인명 사고가 발생하였다. 또한 신대방동 343번지 일대에도 ‘모자원’이라는 지명이 현재까지도 남아있는데, 이곳 역시 이승만 대통령이 전재미망인과 그 자녀를 위해 64가구의 주택을 지어 살게 한 곳이라고 한다. 노량진신대방동모자원과 그들이 살던 주택은 현재는 모두 남아있지 않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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