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6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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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蔡秉德 |
영어공식명칭 | Chae Byong Du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박영실 |
[정의]
6·25전쟁 당시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에서 벌어진 한강방어선 전투를 계획했던 군인.
[활동 사항]
채병덕(蔡秉德)[1915~1950]은 1915년 4월 17일 평안남도 평양시에서 출생하였다. 1923년 평양 종로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보통학교 졸업 후 평양 제1중학교에 입학하였는데, 4학년 때 일본 육군사관학교 시험에 합격하였다. 1937년 6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49기생으로 졸업한 후 규슈[九州] 사세보[佐世保], 오사카[大阪]에도 부임하였다. 1943년에는 부평에 신설된 조병창의 공장장으로 전임하였는데, 이때 조선이 해방되었다.
이후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여 1946년 1기로 졸업하였다. 채병덕은 국방경비대에 부임하였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초대 국방부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육군 총참모장직에도 있었지만, 1949년 남북교역사건으로 해임되었다.
6·25전쟁 발발 당시 육군 총참모장이었던 채병덕은 대통령이 소집한 긴급국무회의에 참석하였고, 의정부 전선을 시찰하면서 북한군에 대한 반격작전을 실시하였으나 이것이 실패하자 한강방어선 형성을 계획하였다. 당시 한강교가 폭파되고 강북의 서울 시가지가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자 채병덕은 수원농업시험장에 육군본부를 개설하고 한강 이남에 낙오병 집결소를 만들어 후퇴병력을 모아 한강선 방어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김홍일을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하고, 한강선 방어임무를 부여하였다. 당시 시흥보병학교 연병장이 집결지가 되어 장병들이 500명 정도만 집결되면 ‘혼성제〇〇대대’로 편성되었다. 한강선 방어전투는 북한군 4개 사단과 전차 1개 여단 대 국군 혼성 5개 사단의 접전이었다.
6월 30일 채병덕 총참모장이 해임되면서, 정일권이 육군 총참모장 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채병덕은 영남편성관구 사령관으로 부임되어 부산으로 갔다. 경상남도 하동을 방어하라는 지시에 따라 이동했다가 1950년 7월 27일 하동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이력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저술 및 작품]
1949년 정민문화사에서 『국군의 진로와 국민개병의 의의(國軍의 進路와 國民皆兵의 意義)』라는 저서를 출판하였다.
[묘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의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50년 12월 충무무공훈장, 1952년 을지무공훈장, 1956년 10월 무공포장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