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6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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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澤相 |
영어공식명칭 | Jang Taeksang |
이칭/별칭 | 창랑(滄浪)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이혜영 |
출생 시기/일시 | 1893년 - 장택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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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06년 - 장택상 소학교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07년 - 장택상 일본 야마구치 현(山口縣)의 소학교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08년 - 장택상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13년 - 장택상 영국 에든버러[Edinburgh] 대학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장택상 상해임시정부 구미위원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장택상 경일은행 상무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38년 - 장택상 투옥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 장택상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외교부장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 장택상 한국민주당 결성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 장택상 수도관구경찰청장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 장택상 초대 외무부장관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50년 - 장택상 제2대 민의원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52년 - 장택상 제3대 국무총리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54년 - 장택상 제3대 민의원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55년 - 장택상 공화당 결성 |
활동 시기/일시 | 1956년 - 장택상 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회 위원장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58년 - 장택상 제4대 민의원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58년 - 장택상 반공투쟁위원회 위원장 |
활동 시기/일시 | 1960년 - 장택상 반독재민주수호연맹 결성 |
활동 시기/일시 | 1960년 - 장택상 제5대 민의원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63년 - 장택상 군정연장반대투쟁위원회 고문 |
활동 시기/일시 | 1963년 - 장택상 자유당 총재 |
활동 시기/일시 | 1964년 - 장택상 반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의장 |
활동 시기/일시 | 1966년 - 장택상 신한당 고문 |
활동 시기/일시 | 1969년 - 장택상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고문 |
몰년 시기/일시 | 1969년 8월 1일 - 장택상 사망 |
출생지 | 장택상 출생지 - 경상북도 구미시 오태동 46번지 |
거주|이주지 | 장택상 거주지 -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동 91-1번지 |
거주|이주지 | 장택상 시흥 별장 - 경기도 시흥시 시흥5동 |
거주|이주지 | 월파정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1동 15번지 |
활동지 | 수도관구경찰청 -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3가 |
활동지 | 중앙청 - 서울특별시 세종로 1번지 |
활동지 | 경남도청 무덕전 - 부산광역시 서구 구덕로 225 |
활동지 | 태평로 국회의사당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125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
성격 | 정치인 |
성별 | 남 |
본관 | 인동 |
대표 경력 | 국무총리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정치인.
[개설]
장택상(張澤相)[1893~1969]의 호는 창랑(滄浪)이다. 수도관구경찰청장, 초대 외무부장관, 국무총리, 민의원 의원을 지낸 관료이자 정치인이다.
[가계]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청송군수, 경상북도 관찰사를 역임한 장승원(張承遠)의 3남이다. 어머니는 풍양 조씨이다. 형인 장길상과 장직상은 대구에서 경일은행을 설립해 운영했으며, 장직상은 대구상공회의소 회장과 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활동 사항]
장택상은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태어나 한학을 수학한 후 상경하여 우남학회에서 운영하는 소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일본의 와세다 대학을 거쳐 영국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했다. 에든버러 대학 중퇴 후 미국으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 구미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김규식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다. 1930년 귀국해 경일은행 상무에 취임했고 1938년에는 청구구락부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칠곡에서 은거하던 중 해방을 맞았고 곧 상경해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외교부장에 취임했다. 한국민주당 결성에 참여했으며, 1946년 수도관구경찰청장에 임명되었다. 정부 수립 후 초대 외무부장관에 취임했고, 제2대, 3대, 4대, 5대 민의원 의원을 역임했다. 의회에서는 정당 소속 없이 무소속의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2대 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1948년 원래 주인이던 김정순이 구속된 후 동작구 노량진의 월파정을 넘겨받아 별장으로 사용했다. 이승만 정권 말기에는 친여단체인 반공투쟁위원회 위원장에 피선되었고, 1960년 정부통령선거에 반독재민권수호연맹의 대통령 후보로 입후보하려 했으나 등록 서류를 강탈당해 실패했다. 등록 서류 강탈은 후에 당시 내무부장관인 최인규와 장택상이 모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5·16쿠데타 이후 군정연장반대투쟁위원회 고문, 반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의장, 신한당 고문,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고문을 역임하는 등 군부정권에 반대해 활동했다. 1969년 사망했다.
[저술 및 작품]
『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장택상 편』[희망출판사, 1966]을 집필하고, 1966년 2월 1일부터 31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수상잡초(隨想雜抄)」를 연재했다.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