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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689
한자 任永信
이칭/별칭 승당(承堂)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김인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9년 11월 20일연표보기 - 임영신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4년 9월 - 임영신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26년 9월 - 임영신 남캘리포니아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33년 - 임영신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무
활동 시기/일시 1935년 4월 - 임영신 중앙보육학교(中央保育學校) 교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2년 1월 - 임영신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활동 시기/일시 1945년 8월 18일 - 임영신 조선여자국민당(朝鮮女子國民黨) 창당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0월 - 임영신 중앙여자전문학교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48년 8월 4일 - 임영신 상공부장관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9년 1월 13일 - 임영신 국회의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53년 2월 - 임영신 중앙대학교 총장 취임
몰년 시기/일시 1977년 2월 17일연표보기 - 임영신 사망
출생지 임영신 출생지 -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
학교|수학지 중앙대학교 -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로 84 지도보기
묘소 중앙대학교 -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로 84 지도보기
성격 정치인
성별
본관 풍천
대표 경력 상공부장관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중앙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교육자이자 정치인.

[개설]

임영신(任永信)[1899~1977]은 3·1운동 시 전주에서 시위를 주도하여 투옥되었다. 1935년 중앙보육학교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하였다. 8·15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초대 상공부장관과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중앙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냈고 언론사의 사장도 역임하였다.

[가계]

임영신의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1899년 음력 11월 20일 전라북도 금산군(錦山郡)[현재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上屋里)에서 아버지 임구환(任九桓)과 어머니 김경순(金敬順)의 12남매 가운데 5녀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임영신은 5세 때 마을에 들어온 최씨 부인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를 접한 이후 기독교 신앙인으로 살기 시작했다. 1909년 금산 집 근처의 심광학교(心光學校)에서 한글을 배웠다. 1914년 9월 전주(全州)의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에 입학하여 재학하던 중 교사 박현숙(朴賢淑)의 지도 아래 유현정(柳賢貞) 등과 항일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였으며, 1918년 3월 졸업한 뒤 충청남도 천안(天安) 입장면(笠場面) 양대학교(良垈學校)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전주에서 비밀결사대의 동지 14명과 함께 군중들에게 태극기와 선언서를 나누어 주고 만세 시위를 주도하여, 이른바 소요죄(騷擾罪)와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대구복심법원(大丘覆審法院)의 최종 판결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의 형을 받았다. 옥고를 치른 후 일본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廣島基督女子專門學校]에 편입하여 1921년 졸업·귀국한 뒤 1922년까지 공주(公州) 영명여학교(永明女學校)와 서울의 이화학당(梨花學堂)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1926년 9월 로스앤젤레스의 남캘리포니아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 입학하여 1930년에 졸업하고, 이어 대학원에 진학하여 이듬해에 논문 「한국 불교도들의 기독교신앙으로 전향하는 길」로 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의 끝 무렵 이승만(李承晩)의 ‘승’자를 따서 승당(承堂)이라는 호를 지었다. 1933년 1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교육사업과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여성운동에 앞장설 포부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1933년부터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무 등을 역임하였으며, 1935년 2~3월경 재정난으로 폐교 위기에 처한 중앙보육학교(中央保育學校)의 경영권을 인수하고 동년 4월 교장에 취임하였다. 1941년 10월 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이 조직되자 중앙보육학교 대표로 참여했으며, 1942년 1월 산하 단체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조직되자 김활란(金活蘭) 등과 함께 지도위원을 맡았다.

8·15해방 직후인 8월 18일 최초의 여성 정당인 조선여자국민당(朝鮮女子國民黨)을 창당하여 당수로 추대되어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해 10월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된 뒤, 1946년 9월 중앙여자대학으로 승격시킨 뒤 초대 학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도미(渡美)하여 2년간 미국 정계와 UN을 상대로 대한민국 수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귀국 후인 1948년 8월 4일 대한민국정부 초대 내각의 상공부장관으로 발탁되었는데 유일한 여성 각료이자 동양 최초의 여성장관이었다. 1948년 9월 중앙여자대학을 남녀공학인 중앙대학[1948년 5월 인가, 동년 8월 남녀 학생 모집]으로 개편하여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49년 1월 13일 경상북도 안동(安東) 을구(乙區) 지역에서 실시된 보궐선거에 입후보하여 국회의원에 당선함으로써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선거운동 과정에서 독직(瀆職) 사건이 불거졌다. 3월 31일 감찰위원회가 상공부장관직을 파면하였고, 5월 28일 검찰이 불구속 기소하자 6월 6일 상공부장관직에서 물러났으나, 1·2심에 이어 1951년 9월 18일 대법원의 최종판결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1950년 2월 상공일보사(商工日報社) 사장으로 취임하여 언론계에서도 활동하였으며, 5·30선거에 대한여자국민당(大韓女子國民黨)의 당적으로 고향인 금산군에 출마하여 유일하게 재선한 여성의원으로 등원하였다. 1952년 여성계사(女性界社) 사장, 1953년 2월 종합대학 중앙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57년에 남캘리포니아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고, 1961년 11월 중앙문화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63년부터 1971년까지 대한부인회 회장, 1965년부터 1973년까지 교육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1년 민주공화당 고문, 1972년부터 1976년까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과 운영위원 등을 지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My Forty Year Fight for Korea』가 있다.

[묘소]

1977년 2월 17일 사망하였으며 중앙대학교 교정 내의 ‘할매동산’이라는 곳에 묻혔으나, 2009년 동상을 학교 내의 승당관 앞으로 옮기면서 묘를 없애고 유해를 화장해서 동상 밑에 안치했다.

[상훈과 추모]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미국 아이젠하워상, 청조근정훈장 등을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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