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6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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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康勳 |
이칭/별칭 | 청뢰(靑雷)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박우현 |
출생 시기/일시 | 1903년 6월 13일 - 이강훈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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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이강훈 신민부 탈퇴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9월 - 이강훈 남화한인청년연맹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3월 17일 - 이강훈 주중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암살 모의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10월 10일 - 이강훈 출옥 |
활동 시기/일시 | 1960년 - 이강훈 귀국 |
활동 시기/일시 | 1969년 - 이강훈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77년 - 이강훈 독립유공자공적심의위원 역임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이강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활동 시기/일시 | 1988년 - 이강훈 광복회 회장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2003년 11월 12일 - 이강훈 사망 |
출생지 | 이강훈 출생지 - 강원도 김화군 서면 청양리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216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본관 | 전주 |
대표 경력 | 광복회 회장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독립운동가.
[개설]
이강훈(李康勳)[1903~2003]은 3·1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신민부 등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다가 1931년 9월 상해에서 결성된 무정부주의단체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했다. 1933년 3월 17일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어 징역 15년형을 받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출옥했다.
[가계]
이강훈의 본관은 전주이다. 호는 청뢰(靑雷)이며, 이기원(李起源)의 차남이다.
[활동 사항]
1903년 강원도 김화군 서면 청양리에서 출생했다. 3·1운동에 참가한 후 1920년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가, 북간도 국자가(局子街)로 가 학업을 계속했다. 1924년 사범학교 졸업 후에는 신민부에도 가담했는데 주로 교육운동에 매진했다. 1928년 신민부를 탈퇴하고 길림성 밀산현에 보신학교(普新學校)를 세워 교육사업을 실시했다.
이강훈은 1931년 9월 상해에서 결성된 무정부주의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한 뒤 이 단체에서 조직된 이른바 ‘흑색공포단’에서 활동했다. 1931년 11월 백정기가 조직한 흑색공포단은 ‘현 사회의 모든 권력을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 전인류가 인생의 모든 방면에서 자유와 평등을 향응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의 수립’을 강령으로 하였다.
1933년 이강훈은 백정기, 원심창 등과 당시 일본 주중공사였던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의 암살을 모의했다. 이른바 ‘육삼정의거’로 불리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본의 정보원에 의해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고 이강훈은 체포되었다. 해방 이후인 1945년 10월 10일 일본 도쿄 교외에 있는 부중(府中) 감옥에서 출옥했다.
이강훈은 출옥 이후 일본에 남아 재일한국거류민단 부단장을 지냈으며, 1960년 귀국하여 한국사회당 총무위원으로 활동했고,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때 혁신계 정당 간부로 활동하다가 투옥되어 1963년 석방되었다. 1969년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1977년 독립유공자공적심의위원, 1988년 광복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이강훈은 2003년 11월 12일 사망했다.
[저술 및 작품]
저술로는 『무장독립운동사(武裝獨立運動史)』[서문당, 1975],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사(臨時政府史)』[서문당, 1975], 『항일독립운동사(抗日獨立運動史)』[정음사, 1979], 『청사에 빛난 순국선열들(대한독립항쟁사의70인)』[역사편찬회, 1990]가 있다.
[묘소]
이강훈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216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