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6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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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弼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박우현 |
출생 시기/일시 | 1869년 11월 9일 - 이필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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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일 - 이필주 3·1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11월 4일 - 이필주 출옥 |
몰년 시기/일시 | 1942년 4월 21일 - 이필주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이필주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출생지 | 이필주 출생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16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민족대표 33인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독립운동가.
[개설]
이필주(李弼柱)[1869~1942]는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 대표로 3·1운동에 참여했다. 남대문에 있는 상동(尙洞) 예배당의 전덕기(全德基) 목사를 중심으로 한 상동청년회에 가입하며 기독교인으로 활동했다.
[가계]
이필주의 본관은 공주이다. 중시조 이명덕(李明德)[1373~1444]의 18대손이며, 이윤영(李允永)의 장남이다.
[활동 사항]
이필주는 1869년 11월 9일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다. 22세가 되던 1890년 관군에 지원해 1907년까지 복무했다. 1902년 전염병으로 두 자녀를 잃는 시련을 겪고 기독교에 귀의해 상동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1904년 10월 15일 개교한 상동청년학원에서 체육을 가르쳤다. 1907년 교장이었던 전덕기를 도와 신민회 활동도 지원했다.
1919년 3·1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기독교감리회 대표로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렸고, 태화관에서의 독립선언식에 참여했다. 체포된 이필주는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1921년 11월 4일 출옥했다. 석방된 이후 목회활동을 통해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다가 1942년 4월 21일 수원에서 사망했다.
[묘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16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