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6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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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麟榮 |
이칭/별칭 | 공진(公振),중남(中南),인영(寅榮)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박우현 |
출생 시기/일시 | 1866년 9월 - 이인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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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96년 2월 - 이인영 을미의병 가담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9월 2일 - 이인영 정미의병 가담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12월 - 이인영 13도창의대진소 대장 추대 |
몰년 시기/일시 | 1909년 9월 21일 - 이인영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이인영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출생지 | 이인영 출생지 - 경기도 여주군 북면 내룡리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68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
성격 | 의병장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13도창의대장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개항기 의병장.
[개설]
이인영(李麟榮)[1866~1909]은 을미의병과 정미의병에 가담했던 의병장으로 1907년 12월 결성된 13도의병연합부대의 대장을 역임했다.
[가계]
이인영의 본관은 경주이다. 자는 공진(公振), 호는 중남(中南)이다. 아버지는 이현상(李顯商)이다.
[활동 사항]
이인영은 1868년 경기도 여주군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유학자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었는데,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하여 1896년 2월 유인석, 이강년 등과 을미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부모를 모시고 경상북도 문경에 은거하다가 1907년 9월 2일 원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정미의병에 가담했다. 또한 1907년 9월 25일자 대한관동창의장 명의의 격문을 각국 영사관과 미국주재 한인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이인영은 창의 직후 전국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했고 관동창의군을 결성했다. 이후 전국 연합의병부대를 결성하고자 노력해 경기도 양주에 총 48진에 1만 여명에 달하는 의병이 모이게 되었다. 이인영은 이들이 모인 13도 창의대진소의 13도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결전을 앞둔 1908년 1월 28일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군사장 허위에게 후사를 맡긴 뒤 문경 본가로 내려갔다. 결국 이인영은 1909년 6월 7일 문경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고, 8월 13일 교살형을 언도받아 9월 21일 경성감옥[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했다.
[묘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68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