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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654
한자 柳寬順
영어공식명칭 Yu Gwan-su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조은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2년 12월 16일연표보기 - 유관순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5년 - 유관순 이화학당 보통과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일 - 유관순 3·1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1일 - 유관순 3·1운동 참가
몰년 시기/일시 1920년 9월 28일연표보기 - 유관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유관순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유관순 출생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생가길 18-2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위패봉안관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학생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봉안된 독립운동가.

[개설]

유관순(柳寬順)[1902~1920]은 1919년 4월 1일 아우내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 후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한 독립운동가이다.

[가계]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의 둘째 딸이다.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활동 사항]

유관순은 1915년 공주의 감리교 여선교사 앨리스(Alice J. Hammond Sharp)의 추천으로 사촌언니 유예도(柳禮道)와 이화학당 보통과 교비생[장학생]으로 입학했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가행진이 시작되자 거리로 나가 만세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3월 5일 남대문역[현재 서울역] 앞 학생단 시위 때도 참여했다가 붙잡혀 경무총감부에 구금 중 이화학당의 교섭으로 다른 학생들과 같이 풀려날 수 있었다.

학교가 휴교하자 3월 13일 독립운동 자금 모금을 지시받은 사촌언니 유예도와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가난한 시골 고향에서 자금 모금이 여의치 않자 이를 대신해 부친 유중권, 숙부 유중무, 동네 어른 조인원[조병옥 부친] 등이 나서 4월 1일[음력 3월 1일]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근 지역을 돌며 시위운동에 나설 것을 적극 설득하는 한편, 시위운동에 쓸 태극기를 만들었다.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에 약 3천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오후 1시 지령리 교회 속장 조인원의 독립선언서 낭독 후 시작된 시위행진에서 아버지와 숙부 유중무, 조인원 등의 지도자들과 함께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열에 앞장섰다. 병천 일본 헌병주재소와 천안철도엄호대 소속 일제 군경의 무차별 발포로 부친과 모친 등 19명이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피신 중 체포되어 진행된 공주지방법원 1심 재판에서 유중무, 조인원 등 지도자급 인물들과 같은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경성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여 징역 3년 형으로 확정되었다. 서대문 감옥에 수감된 후 고문과 상처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계속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1920년 3·1운동 1주년을 맞아 감옥 안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또 다시 고문을 받아 방광이 파열되었으나 상처를 치료해주지 않아 건강이 악화되었다. 결국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 감옥 안에서 사망했다.

[묘소]

유관순의 시신은 약 보름이 지나서야 이화학당에서 인계받아 정동제일교회에서 간략한 장례 의식 후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후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 과정에서 무연고묘로 파헤진 후 유골의 행방은 알 수 없다. 국립서울현충원 위패봉안관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1947년 9월 유관순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다. 1967년 지령리에 유관순 기념교회가 건립되었고 1969년 4월에는 탑원리에 유관순사우 부지를 매입해 1972년 10월에 추모각을 완공했다. 2002년 ‘유관순 열사 탄신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사우 내에 유관순열사기념관을 착공, 이듬해 개관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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