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6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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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東完 |
이칭/별칭 | 고봉(高峯),근곡(槿谷),근생(槿生),근곡생(槿谷生),근(槿)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황민호 |
출생 시기/일시 | 1885년 12월 27일 - 박동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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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5년 - 박동완 기독신보사 서기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2월 27일 - 박동완 3·1운동 민족대표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11월 5일 - 박동완 출소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1월 20일 - 박동완 물산장려회 창립준비위원 선출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7월 - 박동완 『신생명』 주간으로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2월 - 박동완 신간회 본부 총무간사 선출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8월 - 박동완 한인교회 초대 담임목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34년 - 박동완 한인기독교보 창간 |
몰년 시기/일시 | 1941년 2월 23일 - 박동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박동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출생지 | 박동완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신읍동 산읍리 |
활동지 | 박동완 독립운동 활동지 - 미국 하와이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담임목사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봉안된 독립운동가.
[개설]
박동완(朴東完)[1885~1941]은 감리교계 목사로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가하였으며, 이후 물산장려운동 창립준비위원 및 신간회 본부 총무간사, 재만한인옹호동맹의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7월에는 기독교계 잡지 『신생명』의 발간을 주도하는 한편, 흥업구락부에도 가담하였다. 1928년 8월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여 『한인기독교보』를 발간하는 등 한인사회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가계]
본관은 함양(咸陽), 아명(兒名)은 고봉(高峯)이고 지평공파(持平公派) 중 판서공파(判書公派) 26세손이다. 호는 무궁화골을 뜻하는 근곡(槿谷)이며, 근생(槿生), 근곡생(槿谷生), 혹은 근(槿) 등의 필명을 사용하였다.
[활동 사항]
박동완은 1885년 12월 27일 경기도 포천군 산읍리[일명 병호굴]에서 태어났으며, 5세 때부터 한학(漢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3세에 현석운의 딸 현미리암과 결혼하였다. 양사동소학교와 관립고등소학교 및 한성중학교를 거쳐 한성외국어학교에 진학하여 영어를 배웠으며, 한성외국어학교가 폐쇄되자 배재학당 대학부로 전입하였다. 1915년 기독신보사의 서기(書記)가 되었으며, 3·1운동 당시에는 북감리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2월 박희도로부터 3·1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2월 27일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의 사택에서 함태영(咸台永), 오화영(吳華英), 김창준(金昌俊)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하였다. 3월 1일 태화관에서 개최된 독립선언식에 참가한 후 체포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 11월 5일 만기출옥하였다.
1923년 1월 20일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물산장려회 발기총회’에서 창립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4년 7월에는 조선기독교창문사에서 발간하던 『신생명(新生命)』의 주간을 역임하였다. 1925년 3월에는 기독교계 비밀결사인 흥업구락부에 참여하였으며, 1927년 2월에 결성된 신간회에서는 본부 총무간사로 활동하였다. 1927년 12월 재만동포옹호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이 결성하자 중앙상무집행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28년 1월 만주의 길림성 일대를 돌며 동포들의 피해 실태를 조사하고 귀국하였다.
1928년 8월 일제의 감시와 압박이 가중되는 가운데 하와이 와히아와(Wahiawa)섬 한인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34년에는 『한인기독교보(韓人基督敎報)』를 창간하였으며, 이승만이 주도하는 동지회(同志會)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1940년 교회를 카우아이(Kauai)섬 감리교회로 옮겼으며, 한인교포로 구성된 각 단체 임시대표회의의 위원장을 맡아 한인사회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던 중 1941년 2월 23일 사망하였다.
[묘소]
1941년 4월 유골이 국내로 돌아와 망우리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1966년 6월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봉안되었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박동완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여 1962년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