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6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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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閔宗植 |
영어공식명칭 | Min Jong-sik |
이칭/별칭 | 윤조(允朝),퇴초자(退樵子)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조은경 |
출생 시기/일시 | 1861년 3월 4일 - 민종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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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82년 - 민종식 별시 문과 병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3월 - 민종식 의병 봉기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5월 - 민종식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 공격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7월 - 민종식 진도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12월 - 민종식 석방 |
몰년 시기/일시 | 1917년 6월 26일 - 민종식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민종식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74년 10월 17일 - 민종식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 안장 |
출생지 | 민종식 출생지 - 경기도 여주시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의병장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개항기 의병장.
[개설]
민종식(閔宗植)[1861~1917]은 1905년 을사늑약에 항거하며 전개되었던 홍주의병 당시 홍주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홍주성 전투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가계]
민종식은 아버지 민영상(閔泳商)과 어머니 기계 유씨(俞氏) 사이의 3대 독자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활동 사항]
민종식은 1861년 3월 4일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1882년 별시 문과 병과 급제 후 예문관 검열 등을 거쳐 고종을 곁에서 모시는 도승지를 맡았다. 1895년 을미사변 후 관직을 버리고 충청도 정산[현재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으로 내려가 은둔했다. 1905년 을사늑약 강제 후 상경해 상소를 올리려고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충청남도 정산으로 돌아왔다.
낙향 후 의병 봉기를 계획하던 중 1906년 2월 하순 안병찬(安炳瓚), 이용규 등의 요청으로 홍주의병 대장 자리에 올랐다. 가산을 팔아 군자금 2천 원을 마련해 군수품으로 제공하고 의진의 근거지를 정산군 천장리로 삼아 부대 편성을 마쳤다. 1906년 3월 15일 광수장터[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에서 봉기를 시작해 홍주성 공격을 명령했으나 3월 17일 관군의 기습 공격으로 합천 전투에서 패배했다. 5월 9일 홍산군 지티에서 의진을 다시 일으켜 5월 13일부터 5일 간 서천, 비인, 남포 일대에서 전투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사기가 오른 홍주의병을 이끌고 5월 19일 홍주성 공격을 개시했다. 1천여 명의 의병은 홍주의 삼신당리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기고 구식 화포 2문을 선두에 내세워 홍주성을 포위 공격했다. 홍주성 점령 후 총기와 탄약, 우편국의 금품을 확보하고 새로운 조직을 편제하는 한편, 을사오적과 이토 히로부미 처단의 당위성과 의병봉기 이유 등을 밝힌 상주문을 고종에게 올리게 했다. 그러나 5월 31일 일본군 보병 제60연대 대대장 다나카[田中] 소좌가 이끄는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소대, 그리고 전주수비대 1개 소대의 공격으로 홍주성이 함락되었다.
홍주성 전투 패퇴 후 간신히 성을 빠져나와 은신처를 옮겨가며 재기를 계획하다가 1906년 11월 20일 체포되었다. 공주부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12월 7일과 25일에 모두 4차례의 심문을 받았다. 1907년 7월 3일 “정사(政事)를 변경하기 위하여 난(亂)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가 다음날 종신유배형으로 감형된 후 진도 유배형에 처했다. 진도에서 유배 생활을 한지 5개월 뒤인 1907년 12월 순종이 즉위하면서 특사로 석방되었다. 1917년 6월 26일 사망했다.
[묘소]
1974년 10월 17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