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6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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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盧伯麟 |
영어공식명칭 | No Baek-rin |
이칭/별칭 | 경보(景輔),계원(桂園),진방(鎭邦)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조은경 |
출생 시기/일시 | 1875년 1월 10일 - 노백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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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895년 6월 - 노백린 일본 게이오의숙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898년 11월 - 노백린 일본 육군사관학교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899년 11월 - 노백린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 노백린 대한구락부 결성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노백린 서우학회 가입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노백린 육군무관학교장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9월 - 노백린 대한공업회 조직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6년 8월 - 노백린 중국으로 망명 |
활동 시기/일시 | 1916년 12월 - 노백린 하와이 호놀룰루 도착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11월 - 노백린 『태평양시사』 창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9월 - 노백린 상하이 임시정부 군무총장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7월 - 노백린 윌로우스 비행학교 개소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8월 - 노백린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 사임 |
몰년 시기/일시 | 1926년 1월 22일 - 노백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노백린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3년 8월 10일 - 노백린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묘역 안장 |
출생지 | 노백린 출생지 -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성상리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묘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독립운동가.
[개설]
노백린(盧伯麟)[1875~1926]은 미국 하와이,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상해 임시정부의 군무총장,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가계]
노백린은 아버지 노병균(盧秉均)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활동 사항]
1875년 1월 10일 황해도 풍천군 풍천면(豊川面) 성상리(城上里)[현재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성상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6월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했다. 사관 예비학교 성격의 세이조학교[成城學校]에서 공부를 마친 후 1898년 11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이듬해 11월 제11기로 졸업했다. 임관 후 보병 제1연대와 제3연대 포병대와 공병대에서 견습사관으로 있다가 1900년 6월 귀국 후 1901년 4월 육군무관학교 교관에 임명된 이래 1907년 육군 무관학교장이 되어 1908년 사임 때까지 사관 양성에 매진했다.
1905년 11월 대한구락부(大韓俱樂部) 결성에 참여했고 1906년 10월 관서지방 인사들로 조직된 서우학회에 가입했으며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에서 병식 체조를 가르쳤다. 대한자강회, 대한협회(大韓協會), 신민회(新民會) 조직에 참여했고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 명예 교사로 있었다. 1906년 김구 등이 조직한 해서교육총회(海西教育總會)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1909년 제2회 총회 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09년 9월에는 퇴역한 장교들과 함께 대한공업회 조직에 참여했다.
1916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2개월간 체류 후 10월 상하이를 출발하여 12월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에 도착해 박용만(朴容萬)이 조직한 대조선국민군단 별동대 주임으로 군사 활동에 참여했다. 1918년 11월에는 『태평양시사(太平洋時事)』를 창간해 사장 겸 주필로 있었다. 1919년 3·1운동의 결실로 수립된 한성임시정부의 군무부총장으로 임명되고, 9월 상하이 통합 임시정부에서도 군무총장으로 선임되어 하와이에서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1920년 7월 윌로우스 비행학교를 개소하고 1921년 2월 상하이에 도착해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그러나 1922년 노백린을 제외한 국무위원이 총사임하는 등 임시정부가 무정부 상태에 빠지자 8월에 국무총리로 임명되었으나 난국 타개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국무총리 사임서를 제출하여 1924년 4월 처리되었고 다시 1개월 만에 군무총장, 곧이어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12월 박은식을 대통령 대리로 하는 내각에서는 군무총장과 교통총장을 겸임했다. 건강 악화로 1926년 1월 22일 사망했다.
[묘소]
1993년 8월 10일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묘역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