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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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東三 |
이칭/별칭 | 한경(漢卿),일송(一松),김긍식(金肯植),김종식(金宗植)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황민호 |
출생 시기/일시 | 1878년 6월 23일 - 김동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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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7년 3월 - 김동삼 협동학교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 김동삼 요령성 삼원보 신흥학교와 경학사 설립에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1일 - 김동삼 대한독립선언서 서명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1월 - 김동삼 국민대표대회 참석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7월 10월 - 김동삼 전만통일회주비회 의장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4월 1일 - 김동삼 농민호조사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10월 5일 - 김동삼 투옥 |
몰년 시기/일시 | 1937년 4월 13일 - 김동삼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김동삼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출생지 | 김동삼 출생지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내앞길 7-3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국민대표회의 의장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독립운동가.
[개설]
김동삼(金東三)[1878~1937]은 1907년 3월 협동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만주로 망명하여 백서농장 장주와 서로군정서 참모장, 국민대표회의 의장, 혁신의회 의장, 한국독립당 고문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가계]
김동삼의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한경(漢卿), 호는 일송(一松)이다. 본명은 김긍식(金肯植), 이명은 김종식(金宗植)이다. 아버지 김계락(金繼洛)과 어머니 영해 신씨(寧海申氏)의 2남 1녀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김동삼은 1878년 6월 23일 경상북도 안동군 임하면(臨河面) 천전동(川前洞)에서 태어났다. 집안에서 가학(家學)을 이어 받고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에게 유학을 배웠다. 1905년을 전후하여 서울을 드나들며 민족의식과 서구사상에 눈을 떴으며, 1907년 3월 류인식(柳寅植) 등과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세우고 신식교육에 힘썼다.
1911년 만주로 이주하여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고 경학사(耕學社) 건립에 참여하는 등 독립군기지 건설에 매진했다. 1913년 3월부터 이름을 중국 동삼성에서 따서 김동삼이라 하였고 동생은 김동만(金東滿)이라고 했다. 1914년 백서농장(白西農庄)을 건립하고 장주가 되어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19년 3월 11일[음력 2월 10일], 길림(吉林)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에 참여했으며, 4월에는 한족회의 서무사장(庶務司長)과 서로군정서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1923년 1월에는 상해(上海)에서 개최된 국민대표대회에 서로군정서와 남만주대표로 참석하여 의장에 선출되었는데 이때 부의장은 윤해(尹海)와 안창호(安昌浩)였다.
1924년 7월 10일에는 전만통일회주비회(全滿統一會籌備會)를 개최하고 의장이 되어 11월 24일 정의부(正義府) 결성을 결정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25년 이상룡(李相龍)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으로 선임된 후 김동삼을 국무위원에 선임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927년 4월 1일 정의부 간부 30여 명과 함께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고 한인농민들의 생활안정과 독립운동 역량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1929년에는 만주 지역 독립운동세력의 좌우합작을 도모하기 위해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1930년 7월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자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31년 10월 5일 오전 11시 하얼빈 도외(道外) 16도가(道街)에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11월 9일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32년 10월 26일 10년형을 선고 받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33년 3월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37년 4월 13일 사망했다. 김동삼이 사망하자 만해 한용운이 시신을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으로 옮겨 5일장을 치뤘으며, 유해는 유언에 따라 한강에 뿌려졌다.
[묘소]
김동삼의 묘소는 1993년 11월 9일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묘역에 조성되었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김동삼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