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6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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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兪應孚 |
이칭/별칭 | 신지(信之),벽량(碧梁),충목(忠穆)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차인배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 무신.
[활동 사항]
유응부(兪應孚)[?~1456]는 1448년(세종 30) 첨지충추원사(僉知中樞院事) 관직을 시작으로 단종 대에는 의주목사(義州牧使), 평안좌도절제사(平安左道都節制使), 강계도호부사(江界都護府事), 세조 즉위후에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올랐다.
1456년(세조 2) 단종복위운동 당시 유응부는 성승(成勝), 박쟁(朴崝)과 함께 별운검(別雲劍)으로 연회장에 참여하여 세조를 직접 시해하는 역할을 맡았다. 결국 김질의 고변으로 계획이 실패하자 유응부 등 주요 연루자는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형(車裂刑)[마차로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을 당한 뒤 3일 동안 저자거리에 효수되었다.
[묘소]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는 사육신의 무덤이 사육신공원으로 조성 관리되고 있다. 언제 어떤 연유로 노량진에 무덤이 조영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노량진이 사육신의 거열형 집행 후 효시 장소라는 설이 있으며, 태학사 조관빈(趙觀彬)[1691~1757]이 비명을 찬술하여 1782년(정조 6)에 건립한 사육신 신도비에 무명의 스님 혹은 김시습(金時習)이 육신의 시신을 일부 수습하여 노량진 언덕에 묻었다고 하는 설이 실려 있다. 사육신공원에는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6인 외에도 김문기(金文起)의 가묘가 추가되었으며, 원래 성삼문의 부친인 성승(成勝)의 무덤이 있었다고 전한다.
[상훈과 추모]
숙종대 사육신의 신원이 회복되면서, 1681년(숙종 7) 사육신의 묘소로 알려진 노량진 언덕에 사당이 건립되었다. 1691년(숙종 17) 12월에는 ‘민절사(愍節祠)’로 사액되었다가, 이듬해 1월 ‘민절서원(愍節書院)’으로 고쳤고 신도비가 세워졌다. 민절사는 현재의 사육신공원 내에 위치하였으나 터만 남아있다. 이밖에 홍주 노운서원(魯雲書院), 연산 충곡서원(忠谷書院), 영월 창절사(彰節祠), 대구 낙빈서원(洛濱書院), 의성 충렬사(忠烈祠) 등에 제향되었다. 유응부는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목(忠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