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5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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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泰輔 |
이칭/별칭 | 사원(士元),정재(定齋),문열(文烈)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선희 |
출생 시기/일시 | 1654년 - 박태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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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77년 - 박태보 문과 장원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82년 - 박태보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 |
몰년 시기/일시 | 1689년 - 박태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23년 - 박태보 시호 내림 |
사당|배향지 | 노강서원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일대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반남 |
대표 관직 | 파주목사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에 있었던 노강서원에 배향된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박태보(朴泰輔)[1654~1689]의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이다. 할아버지는 참판 박정(朴炡)이고, 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박세당(朴世堂)이며, 어머니는 현령(縣令) 남일성(南一星)의 딸이다. 당숙인 세후(世垕)에게 입양되어 뒤를 이었다.
[활동 사항]
1675년(숙종 1)에 식년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1677년(숙종 3)에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다. 1680년(숙종 6)에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수찬·부교리(副校理),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등을 거쳐 교리가 되었다. 1682년에 홍문관의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되어 다른 젊고 유능한 학자들과 함께 학문에 전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이천현감(伊川縣監)에 임명되었고, 부수찬·교리·이조좌랑, 호남의 암행어사, 홍문관 부응교(副應敎), 파주목사 등을 두루 맡았다.
1689년(숙종 15)에 후궁 소의 장씨(昭儀張氏) 소생을 원자로 정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장악한 이른바 기사환국 정국이 있었다. 이때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비할 뜻을 비추자, 박태보와 오두인(吳斗寅) 등 86인의 이름으로 폐위를 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 박태보·이세화(李世華)·오두인 등은 주동자로 몰려 국문을 당하였고, 인현왕후는 폐비되고,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박태보는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도중 노량진에서 나이 36세로 죽었다.
[학문과 저술]
박태보가 활동하던 숙종 때는 서인과 남인 등 정쟁이 치열하였다. 당시 사론(士論)이 둘로 나뉘어 서인 중에서 송시열과 윤선거가 정적으로 논쟁할 때가 있었다. 박태보는 윤선거(尹宣擧)의 외손이었지만 친족관계를 너머 공정하게 의리에 기준하여 시시비비를 가렸다고 평가받는다. 정사에 재능이 있었고, 이치를 분별하여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저서로는 『정재집(定齋集)』14권, 편서로는 『주서국편(周書國編)』, 글씨로는 박임종비(朴林宗碑)·예조참판박규표비(禮曹參判朴葵表碑)·박상충비(朴尙衷碑)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송시열은 박태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소식(素食)하였다. 아울러 자손에게 박태보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숙종은 박태보가 죽은 직후 슬퍼하며 정려문을 세웠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풍계사(豐溪祠)에 제향되었다. 1723년(경종 3)에 문열(文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