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5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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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守溫 |
이칭/별칭 | 문량(文良),괴애(乖崖),식우(拭疣),문평(文平)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선희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에 있었던 효사정에 대한 시문을 지은 조선 전기 문신.
[개설]
김수온(金守溫)[1410~1481]은 조선 초기 세종에서 성종 때까지 활동한 문신이다. 세종의 특명으로 집현전학사를 지냈다. 불경에 통달하고 제자백가와 경서에 밝아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시문에 뛰어나 성삼문·신숙주 등 당시 뛰어난 문장력을 갖춘 학자를 비롯하여 명나라 사신 등과도 교유하여 문장을 겨루었다. 시문에 뛰어난 김수온이 쓴 효사정에 대한 시가 전하고 있다. 효사정은 세종 때 인물인 노한이 어머니를 기리며 머물러 살 던 곳에 세운 정자이다. 김수온은 효사정에 대해 “정자는 푸른 강 끝나려는 곳에 있네. 들 풍경 아득하며 더욱더욱 아름답고, 푸른 봄 구룡(丘隴)은 긴 길에 임했고, 붉은 대궐 연하(煙霞)는 상류에 닿았구나. 높은 나무는 반쯤 사당을 가려서 어둡고, 한가한 구름은 때로 골 어귀를 잠겨 그윽하다. 공사(公事)에 휴가 내노라 늦게 오면 술을 내어 큰잔으로 먹으리라.”라고 시로 표현하였다.
[가계]
김수온의 본관은 영동(永同)이다. 자는 문량(文良), 호는 괴애(乖崖)·식우(拭疣)이다. 할아버지는 김종경(金宗敬)이고, 아버지는 증 영의정 김훈(金訓)이며, 어머니는 이행(李行)의 딸이다.
[활동 사항]
1438년(세종 20) 식년시에서 진사에 합격하고, 1441년(세종 23) 식년 문과에 병과 1위로 급제하여, 정자(正字)가 되었다. 곧 세종의 특명으로 집현전학사가 되었다. 1446년 부사직(副司直)이 되고, 곧이어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승문원교리(承文院郊理)·병조정랑을 역임하였다. 문종이 즉위한 후 1451년(문종 1) 전농시소윤(典農司少尹)을, 다음해에 지영천군사(知榮川郡事) 등에 임명되었다.
1457년(세조 3) 성균사예(成均司藝)로서 문과 중시에 을과 즉 2등으로 합격하고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다음해에 동지중추부사로 승진하고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9년에 한성부윤을 거쳐 다음해에 상주목사가 되었다. 1464년에 지중추부사·공조판서를 지냈다.
1466년(세조 12)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 모두 장원을 해서, 중추부 판사(中樞府判事)에 제수되었다가 곧이어 호조판서로 삼았다. 이때 등준시에 합격한 사람으로 강희맹과 노사신도 있었는데 효사정과 관련있는 인물들이다. 예컨대 예조판서 강희맹은 효사정의 기문을 썼고, 노사신은 효사정을 건립한 노한의 손자이다.
1469년(성종 즉위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오르고,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올라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474년에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학문과 저술]
『치평요람(治平要覽)』·『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석가보(釋迦譜)』를 증수하고 『명황계감(明皇誡鑑)』·『금강경(金剛經)』 등을 번역하는 일을 함께 하였다. 「원각사비명(圓覺寺碑銘)」을 찬하고 사서오경의 구결(口訣)에 참여하였다. 저서로는 『식우집(拭疣集)』이 있다.
[묘소]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 한곡리 18-1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